짧은글 긴여운 – 황필상박사의 생전 컬럼 13-18

황필상박사가 우리의 이웃과 후손을 위해 남기신 컬럼을 실었습니다. 고인의 평소 바램대로 우리는 모두가 훌륭한 인격체로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튼실한 기둥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구원장학재단은 고인이 되신 황필상박사님의 뜻을 계승하여 우리의 젊은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지지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열세번째

나만의 경험

미국의 R.H. 에머슨(1803-1882)은 한평생을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여 사상가•시인•평론가•목사•철학자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훌륭한 인물이다. 그런 박식한 그가, 어느 날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한 늙은 가정부로부터 크게 깨달은 일이 있었다.
에머슨이 시골에 살 때다. 그는 어느 날 자기 아들이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당기며 외양간에 넣으려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들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송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아 에머슨까지 함께 송아지를 당겨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에머슨 부자가 애
를 쓰고 있을 때, 늙은 가정부가 웃으며 이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송아지는 그렇게 힘으로 다루는 게 아닙니다. 제가 송아지를 외양간에 넣어 보지요.”
이렇게 말한 가정부는 자기의 손가락 하나를 송아지 입에 물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송아지는 그 손가락이 마치 어미의 젖이나 되는 듯 쪽쪽 빨았다. 그러자 가정부는 외양간으로 살살 뒷걸음을 쳤고 송아지는 그 손가락을 빨며 그대로 따라왔다. 이에 에머슨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렇구나! 그렇게 하니 정말 쉽게 송아지를 외양간에 가두는구나. 오늘 나는 참으로 큰 것을 배웠다. 어떤 문제에도 그 해결책이 많다는 것과, 가정부도 나의 스승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말한 에머슨은 그 후에 더욱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공자님도 3살 어린아이에게 배운다는 말이 떠오른다. 또한, “경험은 유일하게 순수한 지식이다.”라는 괴테의 말도, 에머슨의 “인생은 하나의 실험이다. 실험이 많아질수록 더욱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얘기도 알 것만 같다.
책상 앞에서 밤을 새워가며 수많은 책을 읽은 위대한 학자도 오직 이론가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만의 고유의 경험을 최대한으로 살린다면 그렇게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을 받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항상 부족하다는 겸손함으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되, 그래도 나만의 독특한 경험이 있다는 자부심을 한껏 느껴보자.

생각에서 성공까지

“생각을 심으십시오! 행동을 거둘 것입니다.
행동을 심으십시오! 습관을 거둘 것입니다.
습관을 심으십시오! 성격을 거둘 것입니다.
성격을 심으십시오! 신용을 거둘 것입니다.
그래서, 신용을 얻으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먼저 생각을 심으십시오.”
영국의 저술가 사무엘 스마일스의 말이다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성공이란 남보다 조금 깊이 생각한 자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의 부를 쟁취한 사람, 관직에 오른 사람, 학문의 경지에 오른 사람 등은 물론, 역사적인 대발견과 대발명, 대제국의 건설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깊은 생각이라는 시작점에서 노력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낸 마지막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었다면 우리는 원시상태에 머물러 본능에만 의존하는 동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프랭크 벤터 마아틴이라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바이올니스트로서 명성을 떨치던 사람인데, 18세 때 그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대장간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 왼쪽 손가락이 모두 잘리고 오직 엄지손가락만 남게 되어 다시는 악기를 만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남은 하나의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바이올린을 잡아 교향악단의 바이올니스트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불구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내가 불구자라고 생각하기 전까지 나는 결코 불구자가 아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생각이란 말인가!
맥아더가 인천 상륙작전을 수행하기에 앞서 참모진과 논의해 보니, 역사상 바다에서 육지로 공격한 전쟁사례는 500회가 있었는데 그 중 499회는 모두 실패하고 단 한 번의 노르만디 상륙작전만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맥아더는 이렇게 말했다.
“그 동안 500번의 전투 중 우리가 눈여겨 볼 대상은 비록 단 한 번이었지만 그래도 성공했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성공한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긍정적, 적극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존재할 뿐이라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생각에서 성공까지 이르는 길, 즉, 생각 →행동 →습관 →성격 →신용 →성공이라는 맨 앞의 이야기는 그 구체적인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말뿐인 것이다.

에디슨 박사

발명왕 에디슨(1847-1931)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진 것 같지 않다. 그것은 그 박사학위가 명예박사 학위인 탓도 있겠지만, 에디슨의 공식 학력이 초등학교의 단 3개월 뿐이라는 내용이 많이 강조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명예박사 학위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명예박사 학위는 그 분야에 탁월한 업적과 공적을 남긴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그야말로 업적이 확인 증명된 권위 있는 박사학위인 것이다. 추천하는 대학교, 대학원장, 문교부장관 모두가 학교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주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에디슨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 뉴욕 주립대학만 해도 전직 국무장관 루우토 단 한 사람에게만 수여했을 정도로 엄밀한 심사를 했던 것이다. 그런 명예박사 학위를, 인류에 크게 공헌한 에디슨이 받았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정작 놀라운 것은 그 박사학위를 에디슨이 식장에 참석하지 않고 전화로 받았다는 사실이다. 에디슨이 그 박사학위
를 무시해서라기보다는, 그 박사학위 받는 시간까지도 연구에 몰두하다가 참석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인 것이다.
시간이 되어도 참석치 않는 에디슨에게 학교 당국은 급히 전화를 걸었다. 빨리 식장에 참석해 달라는 학교측의 요구에 에디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 하지만 저는 지금 실험실에서 하고 있는 일 때문에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습니다. 전화로 그 박사학위를 받을 수는 없습니까?”
당황한 학교측이었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상 최초이자 전무후무하게 전화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 조수의 의아해하는 질문에 에디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아! 사람에게는 시간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네. 그저 밤낮없이 연구실에서 땀 흘려 일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식장에 가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박사학위가 연구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에디슨이었기에 무려 1,300여 종이나 되는 인류를 위한 발명품이 그의 손에서 탄생된 것이었으리라.

인간 승리의 기쁨

4살 어린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려 걷기는커녕 서지도 못했던 한 소녀가, 16년간의 혼신의 노력끝에 육상부문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더니, 올림픽에까지 참가하여 금메달 3개에 세계 신기록까지 수립했다는 사실을 믿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 3개의 금메달도 100m, 200m, 400m계주 종목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100m 경주에 우승한 사람을 우리는 ‘인간탄환’이라는 말로까지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얘기의 주인공은 윌마 루돌프라는 흑인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다. 그녀는 가난한 흑인 가정의 막내딸로 태어났는데, 불행하게도 4살이 되어 심한 소아마비에 걸려 서지도 걷지도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참으로 대단한 분이었다.
‘3년간 계속해서 물리치료를 받는다면 혹시 설지도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왕복 160km, 언제나 만원이어서 서서 갈 수밖에 없는 불편한 흑인 전용의 버스, 이 힘든 일을 어린 윌마를 업고 해낸 것이다. 새벽 4시에 기상해서 오전에는 남의 농장일을 돌봐 주고 오후에는 윌마를 업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을 왕복했던 것이다. 참으로 장한 어머니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3년이 지나 윌마는 드디어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행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겨우 서는 윌마에게 걸음마 훈련을 시킨 것이다. 공원에서 금을 그어 놓고 윌마에게 용기를 북돋으며 걷게 했던 것이다.
1년이 지나 윌마는 절룩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충분히 걸어 학교까지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윌마가 뛰기 시작했다. 매일 학교까지 절룩거리면서 뛰었던 것이다. 걷는 윌마에서 달리는 윌마로 변했던 것이다.그리고 몇 년 후, 그녀 나이 20세가 되어 대학생이 된 윌마는 미국 대표선수가 되었고 결국은 로마 올림픽(1960년)에 출전하여 100m에서는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 200m에서도 우승, 그리고 마지막으로 400m계주 경기의 최종주자로 활약하여 3m 앞서 가던 독일 선수까지 추월하여 미국을 우승시키며 3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것이다.
윌마의 이 인간 승리는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기쁨과 용기를 준다. 또한 ‘인간이 가진 무한한 능력’에 대한 경외심도 느끼게 한다. 그녀가 해냈기에 우리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우리가 쓰지 못하고 버리는 잠재력을 부활시킬 수 있을 것만 같다.
모두 용기를 갖자! 사실 우리 모두는,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 무언가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응징과 아량

웬만한 음악 애호가라면 미국의 재즈가수, 낫 킹 콜(1917-1965)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매혹적인 음성과 애수가 담긴 <모나리자>나 <투 영> 같은 노래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흑인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크게 성공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어쩌면 그가 흑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역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그의 나이 18세, 전혀 무명의 청년 낫은,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백인들만이 사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 때, 몇 명의 백인 청년들이 다가와 길을 물었다. 아버지가 그 길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느닷없이 주먹이 날아오더니 아버지의 얼굴을 강타하는 것이 아닌가.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의 말에 ‘미스터(나으리)’라는 존칭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백인 청년들이 길을 물어 보았던 것은 단지 시비를 걸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일어나 정중히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나으리.”
얼떨결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목격한 청년 낫은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백인 청년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들의 이러한 모습을 본 아버지가 앞을 막으며 말했다.
“낫, 참아!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의미심장한 아버지의 말에 청년 낫은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낫은 밤새 울다가, 끝내는 쪽지 하나를 남기고 집을 떠나고 말았다.
“백인과 대등해지려면 우리 흑인은 백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강자만이 아량과 용서의 권한을 갖는다는 사실을 깨우친 청년 낫은 그 이후 피나는 노력을 했고, 그래서 정말 백인보다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노력은 인종차별에 대한 수모를 겪은 후, 그에 대한 하나의 ‘한풀이’에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이란 ‘지난 일이 원망스럽거나, 원통하거나, 억울하다고 생각되어 응어리가 진 마음’을 말한다. 그것을 푸는데 꼭 적개심이 있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모와 모욕을 감수하며 무조건 참는 것만이 바람직한 일도 아닐 것이다.
최근 일본 각료들의 망언과, 독도의 자기땅 주장을 보면서, 치솟는 울분을 느끼게 된다. 그럴수록 어서 빨리 일본을 능가하는 대한민국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야 응징이냐, 아량이냐를 결정할 것이 아닌가.

공짜는 없다

옛날 어느 나라에 어진 임금이 있어, ‘백성들을 위하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하고 밤낮없이 골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은 좋은 생각을 해내고는 전국의 이름있는 학자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짐이 생각해 보니, 백성들에게 가장 훌륭한 선물은 백성들을 무지로부터 탈출케 해주는 것이오. 그러나 그들은 밤낮없이 많은 일에 시달려 공부할 시간조차 없으니, 여러분들이 노력해서 그들에게 무지를 깨우쳐줄 수 있는 좋은 책을 만들어 보시오.”
학자들은 임금의 백성 생각하는 마음에 깊은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한껏 노력한 끝에 12권의 훌륭한 내용이 담긴 책을 내놓았다. 임금은 이 책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보냈고, 먼저 그 책을 읽어 보았다. 며칠 동안 이 책을 읽은 임금은 학자들을 다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짐이 이 책을 먼저 읽어 보니, 백성들이 읽기에는 뜻이 너무 어렵고 그 내용도 많은 것 같소. 그러니 좀더 쉽고 간략하게 정리해 보시오.”
학자들은 임금의 새로운 명령에 따라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단 한 권으로 축약된 책을 내놓았는데, 임금은 이 내용도 너무 길다며 단 한 줄로 줄여 달라고 했다.
학자들은 저 마다의 논리를 내세우며 갑론을 박하다가 드디어 단 하나의 문장을 골랐는데, 그 내용은 ‘공짜는 없다’라는 것이었다.
“공짜는 없다”라는 말이 과연 최고의 명언이 될 수 있을까?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하며 다소의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어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최고의 명언이 바로 이 말인지 모른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첫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대구 가스폭발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등 일련의 부실공사로 인한 사고를 보면 그것은 쉽게 입증된다.
둘째, 피나는 노력 끝에 대학이나 검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들이 바친 노력의 대가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역시 ‘공짜는 없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셋째, 무리하게 성공의 대열에 들어가려고 부정한 행동을 하다가 병원이나 감옥 신세를 진 사람을 보아도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 기쁨 또한 큰 것이 그렇고, 우리에게 돌아오는 행운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끝내는 도리어 그것이 파멸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들이 또한 그렇다. 그러니 어찌 ‘공짜는 없다’라는 명언이 최고의 명언이 되지 못하겠는가.

큰 죄와 많은 죄

어느 마을에 지혜로운 노인이 있어, 마을 사람들이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찾아와 조언을 구했다. 어느 날 두 명의 부인이 찾아와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물었다.
먼저 한 부인이 말했다.
“저는 젊었을 때 남편에게 말 못할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남편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이번에는 두 번째 부인이 말했다.
“저는 남편에게 도덕적으로 큰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편과의 성격 차이 때문에 사흘이 멀다 하고 싸우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제게도 좋은 해결책을 주십시오.”
두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노인이 말했다.
“첫 번째 부인은 지금 밖으로 나가 주춧돌 크기의 큰 돌 하나를 들고 오시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은 밥그릇 정도의 작은 돌을 여러 개 들고 오시오.”
두 부인은 노인의 말에 따라 그대로 행동했다. 첫 번째 부인은 하나밖에 안되는 돌이었지만 워낙 무거운지라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돌을 들고 왔다. 그러나 두 번째 부인은 돌의 개수는 많았지만 그래도 가볍기 때문에 쉽게 가져올 수 있었다.
노인이 다시 말했다.
“각자 가져온 돌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시오.”
두 부인은 시키는대로 다시 그 돌을 들고 나갔다. 그런데 큰 돌을 들고 왔던 부인은 하나 뿐인지라 쉽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지만, 여러 개의 작은 돌을 가져온 부인은 각각의 제자리를 찾는데 애를 먹어야만 했다. 이에 노인이 다시 부인들을 불렀다.
“죄라는 것은 이런 것이오. 크고 무거운 죄는 그에 대한 죄값도 커서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래도 본인이 그것을 반성해서 속죄한다면 쉬운 반면에, 작은 죄라도 그 횟수가 많아지면 본인이 반성한다 해도 그것을 모두 속죄하기는 어려운 것이오.
첫 번째 부인은 이제껏 자신의 큰 죄를 기억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껴 왔으니 이제부터는 안심하고 사시오. 그리고 두 번째 부인은 지금까지 작은 죄를 계속 짓고 있으니 삼가하도록 하시오.”
죄의 경중과 다소를 비교한 훌륭한 판결문이다.
어려서 지독한 악동이, 그리고 한때의 문제아들이 나중에 사회의 큰 인물로 변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행위

농부가 자기 집 허약한 울타리 밑에 호박씨를 심었더니 그 호박씨가 잘 자라 커다란 호박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러자 호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울타리가 쓰러지고 말았다. 이에 농부가 투정을 부렸다.
“아이고, 호박 때문에 울타리가 쓰러졌네! 허기야 저런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리니 울타리가 어찌 견디겠나. 그러고 보니 조물주도 참 미련하구나. 호박같이 저런 가느다란 줄기에서 이렇게 큰 열매를 맺게 했으니 말이다. 반면에, 이 큰 참나무에서는 겨우 방울만한 도토리나 맺지 않는가. 이건 누가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농부는 이렇게 말하며 옆에 있는 20미터 크기의 큰 참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도토리 하나가 농부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농부는 떨어진 것이 도토리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어휴, 이게 도토리였기에 망정이지 만일 호박이었다면 머리가 깨졌을 거야. 그러고 보니 우리 조물주님은 참으로 신통하신 분이란 말이야. 하시는 일마다 생각이 깊으시고 완벽하시니 말이야.”
농부의 이런 단순한 생각과 행동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결과가 나빠지면 자신의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상황에 따라 금방 자기 주장을 바꾸고, 매사를 즉흥적으로 자기 편한 대로만 해석하는 등등의 행위 말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의 단순한 행위와 같다.
이러한 단순한 행위들이 때로는 솔직하다는 것과 순수하다는 이유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 이렇게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행동할 때, 하나의 순수함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모여 함께 살아가는 사회생활(인간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는 공동생활)에서는 특히, 순수함보다는 도리(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길)와 이성(도리에 맞는 성질)과 합리성(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함)이 먼저 요구되기 문이다.

내조지현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정치가 안영(?∼BC500)은 같은 제나라 명신 관중(?∼BC645)에 비견되는 훌륭한 재상으로, 조세를 감면해 주고 형벌을 낮춰 주는 등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남다른 재능과 노력으로 이렇게 크게 성공할 수 있었지만 체구는 남달리 작았다.
어느 날 안영이 외출을 하게 되어 마부가 이끄는 마차를 탔다. 마부는 경솔한 위인이었으나 그 아내는 현명하고 정숙한 여자였다. 어느 날 마부 아내가 남편의 마차 끄는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안영은 겸손했으나 남편은 말채찍을 휘두르며 우쭐거리는 것이었다. 이에 저녁 때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가 이렇게 충고했다.
“안영의 키는 6척도 못되지만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그래도 겸손하기만 한데, 당신은 8척 장신의 우람한 몸으로 겨우 마부 노릇이나 하면서 무엇이 좋다고 그리 우쭐거리며 오만한 태도를 보이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항상 발전이 없고 보잘것 없는 일이나 맡게 되는 것이 아니겠어요. 이제는 정신을 차리세요.”
이렇게 아내의 따끔한 충고를 받은 마부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 날부터 태도를 일변해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대하며 공손히 처신했다. 마부의 태도가 크게 변한 것을 느낀 안영이 이상히 여겨 까닭을 물으니, 마부는 그날 아내로부터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안영은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마부를 보고, 그를 발탁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어 대부의 벼슬로 천거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내조지현이라는 고사성어로 전해져, 지금까지 아내가 남편을 도와 사업이나 학식 그리고 품격을 향상 시키는 경우에 쓰인다.
남의 뼈아픈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는 일은 힘든 일이다.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 있어야겠지만 자기 자신에게 냉정할 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남에게 냉정한만큼 자기 자신에게는 냉정하지 못한 일면이 있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남에게만 냉정하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남에게 냉정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에게 냉정해야 사람이 발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문제점을 지적해 주는 믿을 수 있는 사람까지 있다면 완벽하다는 얘기다.

확실한 행복

인간 모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남들과 비교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알게 모르게 남들과 비교하고 있는 순간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순간이라고 현인들은 말한다.
왜냐하면, 그 비교 대상이 자신보다 부족한 것이 될 때에는 우월감에 도취되어 자만심이라는 수렁에 빠질 수가 있고, 그 비교 대상이 자신보다 큰 것일 때에는 좌절이라는 벽 속에 갇히거나 감정의 노예가 되어 파멸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예에서 사실처럼 보인다.
병원 의사의 말에 의하면, 환자의 통증이 크면 진통제의 양을 늘리고 통증이 작으면 진통제의 양을 줄인다고 하는데 당연한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전쟁터의 야전병원에서는 이 논리가 적용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 적군의 공격으로 온몸에 상처를 심하게 입은 중환자의 경우에는, 당시의 ‘이제는 죽었구나’라는 절망감으로부터 병원에서 눈을 뜨는 순간 ‘이제는 살았다’라는 안도감으로 바뀌어 모든 일에 희망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찰과상 정도의 경환자들은 ‘이제 치료가 끝나면 다시 전쟁터로 투입되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작은 고통도 크게 느끼게 되어 결국은 많은 양의 진통제가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많다.
집 한칸 없이 사글세 방을 떠돌던 사람은 13평의 좁은 내 집에서도 넓게만 느껴질 수 있고, 직장을 못 구해 곤궁했던 사람은 30만 원의 월급으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60평 아파트에서 40평 아파트로 이사한 사람은 좁다고 불평하며, 100만 원 급여에서 10만 원만 줄어도 수치심을 느끼는 우리가 아닌가.
세상은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현실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누구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어려울 때, 우리가 비교 대상을 잘못 선택하면 불행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중상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해질 수 있지만, 가벼운 부상으로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앞의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옛 선현들의 명언,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해라!”라는 말뜻에는, ‘그 비교 대상을 잡을 때, 폭넓은 경험이 필요하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 누구보다도 확실한 행복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열네번째

한 달 그리고 두 달

곽 선비가 장가를 들었는데 부인의 태도가 방자스러웠다. 시부모 공양도 엉망이었고,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면서, 상스런 말투도 서슴치 않았다. 부인의 이러한 태도에 곽 선비는 아내를 타일러도 보고 심지어 때려 보기까지 했지만 아내의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곽 선비는 ≪맹자≫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착한 것이어서 요순과 같다.”
‘요순’이란 고대 중국의 요 임금과 순 임금을 말하는데, 이들은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찾아가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던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들로서, 사람이 덕스러울 때 쓰는 표현이다.
곽 선비는 이 글을 읽고 깨우침을 받았다.
‘무릇 사람의 심성은 원래 착한 것이어늘, 내가 아내의 못된 것만 보고 너무 심하게 대하였구나!’
곽 선비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태도를 바꾸어 보기로 했다. 그는 즉시 안방으로 달려가 아내에게 큰절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참 훌륭한 분이십니다.”
남편의 이상한 행동에 아내는 놀랐다. 방금 전까지 자기에게 욕하고 때리던 사람이 자기에게 절을 하며 칭찬까지 하니 그럴만도 했다.
“당신은 원래 훌륭한 사람이었소. 그런데 내가 부족해서 당신을 잘못 알고 욕하고 때리기만 했소. 나를 용서해 주시오.”
곽 선비가 이렇게 말하며 다시 절을 하니, 부인도 얼떨결에 맞절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생활의 변화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매일 아침부터 남편이 자기에게 큰절을 하니, 이제는 부인이 오히려 통사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서방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다시는 서방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부인은 드디어 현모양처가 되었다.
“자신을 먼저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는 교훈적 의미를 담은 이야기이다. 세상에서 답을 찾지 말고, 먼저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으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 글중에 숨어 있는 말, ‘한 달 그리고 두 달’이라는 말에도 주목해야 한다. 무슨 변화든 이와 같은 기간이 지속되어야 변화가 확실히 뿌리내리기 때문이다. 그 때쯤 우리 몸과 생각은 비로서 새생활에 적응되기 때문이다 .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독서광으로서, 학생들에게 “사람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유독 강조하시던 어느 은사님의 그 구체적 이유를 소개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는 이유는, 내 자신이 겪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연 때문입니다.
첫째, 책은 나의 선생님입니다.
학창시절이 끝난 지금, 나는 여러분의 선생님이 되었지만 아직도 한없이 부족합니다. 왕년에 내가 부족할 때는 선생님이 계셔서, 배움도 주시고, 용기도 주시고, 꾸짖기도 하시며 나를 바르게 이끌어 주셨지만, 이제 내게 그런 선생님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책을 통해 나의 부족함을 고쳐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책을 선생님으로 대하며, 책을 읽
는 순간을 선생님과의 대화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째, 책이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부족한 나는 언제나 선생님이 필요하지만, 사실 그 선생님을 만나는 문제도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훌륭한 선생님은 도시에도 있을 수 있고, 농촌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미국에도, 영국에도, 아프리카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벽에 갇혀 있는 내가 그들을 만나 직접 대화하며 배운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훌륭한 선생님이라 해도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선생님이라면 이들과 만난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책으로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책이야말로 이러한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책은 인류가 찾아낸 최고급의 진리와 지혜의 숨결이 들어 있는 보고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책을 열심히 읽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배워 놀랍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부족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많은 시행착오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책을 열심히 읽는다면, 타인의 지식과 지혜를 빌려 이러한 시행착오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갈릴레이 덕분에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진리를, 소크라테스 덕분에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
언을, 스미스 덕분에 경제학에 대한 개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책을 통하여 진리와 지혜를 배우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설명이 더 있으셨지만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그러나 위의 3가지 이유만으로도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성공전략

여러분은 성공하기를 정녕 바라는가? 그런데도 성공의 방법이나 전략을 몰라서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기 전문가 몇 사람의 성공 전략을 참조하기 바란다.

먼저, 성공 연구가 나폴레온 힐의 4단계 전략이다.
①우선, 인생의 목표에 대하여 완전하게 기록, 서명, 날인하라. 뇌리에 자꾸 새기라.
②확립된 목표를 왜 달성해야 하는지 기록하라.
③목표에 수정이 가능할 수 있도록 탄력성을 두라.
④원칙에 따라 매진하라.

이번에는 크레멘트 스톤의 4단계 전략이다.
①목표를 문자로 기록해서 구체화 시켜라. 날마다 바라보라.
②기한을 정하여 동기를 부여하면서, 언제까지 이것을 하겠다고 결심하라.
③기준을 높은 곳에 두고 나가도록 하라.
④무한히 노력하라.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의 6단계 내용은 이렇다.
①원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정하라.
②그 목표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할지 명확하게 정하라.
③되어야 하는 기일을 정하라.
④명확한 계획을 세우라.
⑤전체적인 계획을 세우라.
⑥하루에 2회 이상 소리내어 읽어라.

이 세 사람의 성공 전략 이야기에 강조되고 있는 용어는, ‘목표’와 ‘계획’과 ‘기록’과 ‘노력(매진)’일 것이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뚜렷한 목표와, 그 목표를 수행할 수 있는 계획과, 그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끝까지 노력하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사실, 이런 내용은 이미 충분히 알려진 내용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성공하는 사람이 적고 실패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단 하나의 이유, 즉, 행동이 있느냐 없느냐 때문일 것이다. 행동이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긴 안목이 필요하다

한 노인이 새로 개간된 땅에 과일나무 묘목을 심고 있었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이 모습을 보고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께서 심으시는 나무는 무슨 나무요?”
“예, 사과나무올시다.”
“그렇다면 그것이 언제쯤 열매를 맺게 되나요?”
“글쎄올시다. 모르긴 해도 50년 후면 열리지 않겠소?”
“예? 50년이라고요? 그럼 노인께서는 아직도 50년을 더 사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가능할 테지요. 그렇지만 그 때쯤이면 내 손자가 이 사과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하고 있겠지요. 내가 태어났을 때 나의 할아버지께서 심어준 사과나무에서 아버지가 열매를 수확했었듯 말이오.”
노인의 이 대답에 나그네는 자신의 짧은 소견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가까운 산과 들로 놀러가는 사람들이라면 한 끼의 도시락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더 많은 양의 끼니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짧게 생각하는 사람은 길게 생각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지혜 없는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들은 수명이 긴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어찌 한 달이라는 세월을 알 것이며, 매미가 어찌 1년이라는 세월을 알겠는가.
길게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대체로 우리는 긴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긴 안목을 가지고 바라보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가 있다. 한 끼 식사를 위해 식탁 위에 올라 있는 감자 몇 개로도 그것을 밭에 심으면 1년 안에 100배의 감자를 만들 수도 있다. 토마토 하나에서도 수백 배의 수확을 올릴 수가 있다. 도토리씨 하나로도 10개의 거대한 숲을 이룰 수 있는 것이고, 두 개의 계란으로도 양계장까지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긴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다.
어느 회사의 사원들은 사장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후, 배전의 성과를 올렸다 한다.
“여러분의 오늘 계획은 무엇입니까? 또 금주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이 달의 계획은 있습니
까? 당신의 금년 계획과, 인생 계획은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도 사장의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내용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바보 이야기

여러분은 다음에 소개하는 세 명의 바보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겨울날, 첫 번째 바보가 난로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는데, 난로가 달아올라 무척 더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 있던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드디어 하인을 불러 난롯불을 꺼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하인은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듯 이렇게 말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주인님께서는 어째서 의자를 조금 뒤로 물리지 않으셨나요?”
두 번째 바보 이야기다. 어느 날 이 바보는 외츨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적은 ‘××× 외출중’이란 푯말을 문앞에 걸어 놓았다. 한참 후 그는 다시 집에 돌아와 그 푯말을 보더니,
“아, 지금 내가 외출중이라고? 그럼 다시 오는 수밖에 없지.”
하며 돌아섰다고 한다.
세 번째 바보는 이랬다.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온 이 바보가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기차에서 창가를 등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여행하는 동안 내내 기분이 나빴었소.”
“아니, 그러면 창가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이라도 해보지 그랬어요?”
“무슨 말이오? 차 안에는 나밖에 없었는데 누구에게 부탁을 한단 말이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바보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 세 사람은 바보가 아니라, 사실은 천재들이다. 이러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을 차례대로 적어 보면, 만유인력의 발견자 I. 뉴턴(1642-1727), 전기•전자공학에서 전류의 단위로까지 이름이 남아 있는 A.M. 앙페르(1775-1836), 그리고 발명왕 T.A. 에디슨(1847-1931)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재의 뒷면은 바보’라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할 것도 같
다.
이들이 이런 바보짓을 하게 된 동기는 아주 간단하다. 그 무언가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바보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집중상태의 부산물이 바보짓이라는 것이다.
사실, 집중은 성공의 핵심이자 필수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어떤 일에 집중하면 그 성공율은 크게 높아지고, 그래서 자신감도 얻게 되는 것이다. 도중에 이런 재미있는 얘기도 생겨나기도 한다.
한평생 공부만 하신 어떤 노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즐겨 하시곤 한다.
“인생은 집중력으로 결판이 납니다. 공부도, 사업도, 인생도,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 주도해 나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성공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집중력을 발휘해, 성공도 하고, 바보짓도 좀 해보자. 뒷면이 바보라면, 앞면은 천재일 거라는 착각도 해가면서.

진실, 사랑, 희망, 용기

독일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가 파리의 뤽상부르그 공원 옆을 지날 때였다.
초라한 복장의 한 노파가 주저하듯 손을 내밀었다. 릴케가 그 노파의 얼굴을 바라보니, 복장은 비록 초라했지만 눈길은 경건했고 어딘가 위엄도 있어 보였다. 릴케는 이 노파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 자신의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쓱해진 릴케는 때마침 누구에겐가 주려던 장미꽃 한 송이를 노파의 두 손에 꼬옥 쥐어 주며,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는듯 양 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노파는 감격했다.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정 섞인 지폐는 받아 보았지만, 이렇게 진심이 담긴 꽃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감격한 노파는 릴케의 오른손을 잡아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이런 뜻있는 얘기를 했다.
“젊은 양반, 정말 고맙소. 이 쓸모없는 늙은이에게 여지껏 많은 사람들이 보내준 것은 동정이었지만, 젊은이는 내게 사랑과 희망을 주었소. 이제 나도 용기를 갖고 내 삶을 살아가겠소.”
미국의 유명한 성공학자 지그 지글러가 뉴욕의 지하도에 막 들어섰을 때, 누추한 옷의 사나이가 연필을 팔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복장이 워낙 누추했고, 파는 연필도 얼마 되지 않는지라 영낙없는 거지였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의 연필에는 관심이 없었고, 간간이 동전 하나씩을 던질 뿐이었다. 다른 생각에 잠기어 지하도를 걷던 지글러도 앞 사람을 따라 무심히 동전 하나를 던지고는 연필도 받지 않은채 그대로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듯 발걸음을 되돌려, 그에게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아까 1달러 드린 댓가의 연필을 주시오.”
이에 그 거지 연필장사는 당연하다는듯 지글러에게 연필을 내놓았다. 이에 오히려 놀란 지글러가 한 마디했다.
“당신도 신용 있는 사업가구려.”
실제로 이 거지 연필장사는 나중에 훌륭한 사업가가 되었다.
우리의, 불우한 이웃을 바라보는 눈길과 태도는 잘못된 데가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 어린 동정의 눈길이 아니라, 진실과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이다. 그들이 당신을 통하여 이러한 것들을 얻게 되면 얼마든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이 두 이야기는 보여주고 있다.

성실한 생활태도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1839-1937)가 단골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는 종업원에게 항상 15센트의 팁을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주머니에 5센트밖에 없어서 그것만 주었더니 평소에 불만을 갖고 있던 종업원이 투정을 부렸다.
“내가 당신 같은 부호라면 단 10센트를 가지고 그렇게 인색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자 록펠러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생각을 가졌으니까 자네는 종업원에 머므르고 있는 거야. 재벌인 나도 10센트를 아끼는데 어째서 자네는 10센트를 그렇게 우습게 보는가?”
우리는 재벌들로부터 적어도 한 가지는 배워야 한다. 그들은 의외로 남다른 ‘절약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세계 제1의 부호인 록펠러가 단돈 10센트에도 이렇게 인색했지만, 사실 그는 역대 최고로 남에게 돈을 많이 준 자선사업가였던 것이다.
그가 이룬 3가지 기적으로 그의 됨됨이를 알아 보자.
첫 번째 그가 이룬 기적은 가장 가난했던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출발 당시 그는 시간당 단 4센트의 적은 임금을 받으며 땡볕 아래에서 감자를 캐는 일을 했지만, 마지막에는 세계 제일의 재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가 죽고 60년이 되는 지금도, 그가 남긴 재산은 30억 불이나 되어 우리나라 돈으로 하루에 약 1억 원의 이자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가 이룬 두 번째 기적은 역대 최고의 사회사업가라는 것이다. 그가 남을 위해 쓴 돈의 액수는 7억5천만 불(약 6천억 원)로써, 기원 후 2,000년 동안 매일 남에게 72만 원씩이나 주었다는 뜻이나 같다. 사회사업에 투자한 금액으로 지금까지 최고의 금액을 기록한다.
그의 마지막 기적은 장수의 기적이다. 그는 98년을 살았으면서도 그 때까지 이빨 하나 썩지 않는 건강을 누렸다 하니 이것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록펠러의 이러한 세 가지 기적은 신앙생활에 근거한 바른 생활태도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의 충실한 신앙생활은 식사 때 기도 한번 거르지 않은 것과, 하루도 거르지 않은 성경읽기 등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늙어서 눈이 어두워지자 옆에 사람을 붙여 성경책을 읽도록 했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거부로서 세 가지 기적을 이룬 그의 성공 비결은 한 마디로 성실한 생활태도였던 것이다.

‘왜 내 마음이 달라졌을까?’

중국 위나라 임금에게 지극한 신임을 받던 미자하라는 신하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미자하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자 급한 마음에 허락도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탔다. 당시 위나라 법으로는 신하가 임금의 허락없이 수레를 타면 그 사람의 발꿈치를 잘라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금은 오히려 미자하를 칭찬했다.
“미자하는 진짜 효자다. 무거운 형벌도 마다 않고 어머니를 공경했도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임금과 미자하가 함께 정원을 산책하다가, 미자하가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따서 입에 물어보니 유난히 맛이 좋았다. 이에 미자하는 먹던 복숭아를 임금에게 그대로 건내 주었다. 이것도 엄청난 불경죄였다. 그러나 임금은 오히려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자하야말로 짐을 진심으로 섬기도다. 자신이 먹던 맛있는 복숭아도 사양하고 짐에게 주었도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 많은 세월과 함께 이들의 사이도 소원해졌다. 어느 날 미자하가 임금 앞에서 하찮은 실수를 했는데, 임금은 대노했다.
“미자하는 참으로 무엄하도다. 항상 짐 대하기를 우습게 대해 왔도다. 짐의 수레를 허락도 없이 몰래 타기도 했고, 먹던 복숭아까지 준 일도 있다.”
이렇게 말하며 미자하를 쫓아내고 말았다.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모순된 일면이 있다. 똑같은 결과를 전혀 반대로 해석할 수 있는 모순 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허락 없이 수레를 탄 것과, 먹던 복숭아를 준 것에 대한 임금의 두 가지 해석이 바로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임금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도 똑같다.
운전을 할 때면 보행자의 무질서를 나무라고, 보행을 할 때면 운전자의 난폭운전을 나무란다. 시어머니 입장으로 며느리에게 일부종사를 얘기하던 사람이, 장모 입장이 되면 사위에게 남녀평등을 얘기한다. 이것은, 본능의 문제가 아니고 인격의 문제인데도 말이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고쳐야 한다!
모순에 찬 자신의 이중성을 없애고, 반대되는 두 개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 시켜야 한다. 한 번이라도 옳았던 것은 그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왜 내 마음이 달라졌을까?’라는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3파운드의 의미

한 한국인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겪은 이야기다.
그는 며칠 동안 영국에 머물렀기 때문에 한국 음식이 그리웠다. 그리하여 그는 수소문 끝에 한국 음식점이 있는 한 거리를 알아내고는, 택시를 탄 후 운전 기사에게 그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택시 기사는, 런던 시내에는 그런 이름의 거리가 두 곳이 있다며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느냐고 그에게 되물었다. 그는 어느 거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고 말했고, 무조건 한국 음식점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이에 택시 기사는 우선 가까운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곳에는 한국 음식점이 없었다. 그래서 택시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달려서야 한국 음식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요금 계산기에 나온 7파운드를 지불하고 내렸다. 그러자 운전 기사가 3파운드를 그에게 되돌려 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3파운드 만큼의 요금은 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원했던 한국 음식점을 즉시 찾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입니다. 나의 잘못으로 택시비가 오른 것을 손님에게 부담시킬 수는 없습니다.”
서양에서 생활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사례를 적지 않게 겪을 수 있다. 모든 서양인들이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명분 없는 돈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 대부분의 생각이다. 엄격한 법 적용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직종에 관계 없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본 경험이 있는 필자로서는 그러한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청소하는 아가씨도 스스럼 없이 일했고(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사무직원도 친절한 사람이 많았다.(단순한 서양예찬이 아니다.) 그것은 먹고 살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일만은 아니었다. 이왕에 할 바에는 즐겁게 일하자는 것 같았다. 또한 일을 하는한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이기도 했다.
환경과 입장과 배경이 다른 나라를 우리나라와 직접 비교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다 해서 주눅이 들 것이 아니라,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서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문제를 제거하자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영국의 한 택시 기사는 자신의 주머니 돈 3파운드는 놓쳤지만, 영국이라는 나라의 자존심을 선전했다는 의미에서, 사실은 수백만 아니 수천만 파운드의 가치를 창출해 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입에서 영국은 훌륭하다라는 칭찬을 하게 하니 말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성과인가.

첫번째 일

어떤 사람이 친구의 초대로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그는 자신의 마술 솜씨를 보여 주겠다며 준비해 온 도구를 손님들 앞에서 펼쳤다. 그가 마술을 시작하자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은 그에게 눈길을 돌렸고, 그는 능숙한 솜씨로 빈 보자기 속에서 예쁜 파랑새 한 마리를 꺼내 보였다. 그밖에도 그는 계속해서 카드와 접시를 이용한 몇 가지 재주를 더 선 보여 손님들을 즐겁게 했다. 그의 멋진 마술 시범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로 보답했다. 이 때 저 멀리 있던 한 부인이 그에게 다가와, 다음 주 자신의 파티에도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기꺼이 응했고, 1주일 후 그 파티에 참석했다. 상견례가 끝나고 흥겹게 파티가 무르익자, 그는 여주인에게 바이올린을 한번 연주해 보겠다고 말했다.
“바이올린을 연주한다고요? 당신은 마술이 전문 아닌가요?”
부인은 의아하게 생각하고 그에게 물었다.
“예, 그것도 조금은 할 줄 압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며 가져온 바이올린을 꺼내 연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연주 솜씨가 참으로 놀라우니 말이다. 신기에 가까운 그의 연주 솜씨였고,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멜로디였다. 파티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 도취되어 자신이 파티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말았다. 연주는 끝났고, 모든 참석자들은 기립 박수로 보답했다.
그런데 사실, 이 날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사람은 마술사가 아닌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바니올니스트의 거장, F. 크라이슬러(1875-1962)였던 것이다. 세상에는 몇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 우리를 때때로 당황하게 한다. 무슨 비결이 있어 그렇게 여러 재주를 가졌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일도 원리는 같답니다. 끝없는 관심, 지속적인 노력, 그리고 이루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일이 성취되면 자신감을 얻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일부터는 그 경험까지 살려 전보다 더 쉽게 이루어집니다. 보기에 전혀 달라 보이는 두 개의 일도 사실은 서로 깊은 관계가 반드시 있습니다. 문제는 첫 번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죠.”
그들의 말이 사실인지, 우리 모두 지금부터라도 그 ‘첫 번째 일’을 시작해 보자.

열다섯번째

덧셈과 뺄셈

현명한 왕이 있었다. 어느 날 왕은 신하들에게 지혜를 일깨워 주고자, 신하들을 궁궐 담 앞으로 불러내어 담벽에 선 하나를 길게 그려 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짐이 방금 그린 이 긴 선을 경들은 짧게 만들어 보시오. 단, 이 선에 손을 대어서는 절대로 아니 되오.”
신하들은 왕의 명령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을 짧게 하라면서 선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으니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이고 보니 감히 나서서 말하지도 못했다. 모든 신하들이 이렇게 저마다 전전긍긍하며 애를 태우고 있을 때, 뒤에서 신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왕이
이미 그려 놓은 선 밑에 그보다 훨씬 긴 선을 또 하나 그었다. 그랬더니 왕이 그려 놓은 선이 짧아 보였다.
다른 신하들이 주어진 긴 선을 줄여 짧게 만들려고만 하고 있었을 때, 이 신하는 그보다 더 긴 새로운 선을 찾아냄으로써 그것을 짧게 만들었던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다른 사람들은 ‘뺄셈’만을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는 ‘덧셈’을 생각해 낸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행위를 ‘창조적인 행위’라고 부른다. 기존의 것으로부터만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냄으로써 답을 찾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에서 말하는 상식에도 많은 헛점이 있는 것이다. 위의 문제에서, 길다느니 짧다느니 하는 개념도 바로 상식이 가져온 헛점이었던 것이다.(길고 짧음이란 것은 어떤 절대적인 값을 가진 일정한 크기가 아니고, 단순한 상대적인 비교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그보다 더 짧은 것에 비교되면 길어지고, 그보다 더 긴 것에 비교되면 짧아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뺄셈의 법칙으로만 살아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이며 대의명분에도 어긋난다. 이제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 있는 덧셈의 법칙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창조적이며, 생산적이고, 뚜렷한 명분까지 갖춘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줄여놓음으로써 자신이 길어지겠다는 졸렬함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보다 더 길어지려는 노력이야말로 본받을 일이기 때문이다.
수학의 계산에서도 뺄셈보다는 덧셈이 쉽다. 그것은 뺄셈보다 덧셈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더 적게 든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 적은 에너지로, 더 보람있는 덧셈의 인생, 즉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인생을 권장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남의 선을 줄이려 하지 말고, 새로운 또 하나의 긴 선을 찾아내 보자!

피라미드 정상에……

어떤 사람이 배가 고파 빵집으로 들어가 빵을 하나 주문해 먹었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그는 다시 빵을 하나 더 주문해 먹었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섯 개를 먹고, 여섯 개째의 빵을 먹을 때에야 비로서 배가 불러 왔다. 그는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에이, 앞의 다섯 개는 괜히 사 먹었네. 이 빵 하나만 먹어도 이렇게 배가 부른걸.”
비슷한 얘기가 또 하나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허영심 많은 부자가 있어, 이웃 마을 다른 부자가 3층 누각을 지었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을 갔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야, 정말 훌륭한 누각이구나. 특히 3층의 단장은 가히 작품이다, 작품이야!”
사람들의 칭찬이 마르지 않자, 이 허영심 많은 부자는 배가 아팠다. ‘나도 돈이라면 저 사람한테 지지 않은데 왜 누각을 못 짓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목수를 불렀다.
“내게도 멋진 3층 누각을 지어 주게. 특히 3층을 멋있게 지어 주게.”
목수는 즉시 일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누각 올릴 터를 잡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에 부자가 따졌다.
“아니, 누각은 짓지 않고 왜 땅만 파는가?”
“예, 누각을 올리려면 이렇게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야. 내게는 멋진 3층만 필요하지 기초 같은 건 필요 없네. 어서 3층 누각이나 지어 주게.”
부자의 이 어이없는 요구에, 목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가 버렸다.
과정도 없이 무작정 결과만을 쫓는 사람들이 있다. 위의 이야기에서, 여섯 번째 빵만을 생각한 사람이나, 기초도 없이 3층 누각만 원한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제라도, ‘피라미드 정상에 올려진 단 하나의 돌 밑에는 차곡차곡 쌓여진 수많은 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섯 개의 빵이 있어야 여섯 번째 빵에 배가 부르고, 기초가 있어야 3층의 멋진 누각이 선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에만 머무르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제
라도 이것을 인정하고 출발한다면, 그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일은 의외로 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보 이야기

여러분은 다음에 소개하는 세 명의 바보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어느 겨울날, 첫 번째 바보가 난로가에 앉아 불을 쬐고 있었는데, 난로가 달아올라 무척 더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 있던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드디어 하인을 불러 난롯불을 꺼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하인은 도저히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듯 이렇게 말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주인님께서는 어째서 의자를 조금 뒤로 물리지 않으셨나요?”
두 번째 바보 이야기다. 어느 날 이 바보는 외츨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적은 ‘××× 외출중’이란 푯말을 문앞에 걸어 놓았다. 한참 후 그는 다시 집에 돌아와 그 푯말을 보더니,
“아, 지금 내가 외출중이라고? 그럼 다시 오는 수밖에 없지.”
하며 돌아섰다고 한다.
세 번째 바보는 이랬다.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온 이 바보가 아내에게 말했다.
“나는 기차에서 창가를 등진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여행하는 동안 내내 기분이 나빴었소.”
“아니, 그러면 창가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이라도 해보지 그랬어요?”
“무슨 말이오? 차 안에는 나밖에 없었는데 누구에게 부탁을 한단 말이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바보들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 세 사람은 바보가 아니라, 사실은 천재들이다. 이러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을 차례대로 적어 보면, 만유인력의 발견자 I. 뉴턴(1642-1727), 전기•전자공학에서 전류의 단위로까지 이름이 남아 있는 A.M. 앙페르(1775-1836), 그리고 발명왕 T.A. 에디슨(1847-1931)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재의 뒷면은 바보’라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할 것도 같다.
이들이 이런 바보짓을 하게 된 동기는 아주 간단하다. 그 무언가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바보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집중상태의 부산물이 바보짓이라는 것이다.
사실, 집중은 성공의 핵심이자 필수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어떤 일에 집중하면 그 성공율은 크게 높아지고, 그래서 자신감도 얻게 되는 것이다. 도중에 이런 재미있는 얘기도 생겨나기도 한다.
한평생 공부만 하신 어떤 노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즐겨 하시곤 한다.
“인생은 집중력으로 결판이 납니다. 공부도, 사업도, 인생도,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 주도해 나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성공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집중력을 발휘해, 성공도 하고, 바보짓도 좀 해보자. 뒷면이 바보라면, 앞면은 천재일 거라는 착각도 해가면서.

무모한 실험

1920년 인도 캘커타 서남부 정글 지역에서, 싱이라는 목사가 늑대굴에서 자라고 있는 두 명의 소녀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큰 소녀는 일곱 살, 작은 소녀는 두 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두 소녀 모두 온몸에 털이 나 있었으며, 네 발로 기어다녔으며, 먹을 것을 주면 입으로만 핥아 먹었으며, 소리라고는 오직 늑대 울음 같은 ‘우!우!’밖에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산에 버려진 아이들이 어떤 연유로 늑대들과 함께 자라게 되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사람들은 이 소녀들을 ‘늑대 소녀’라 불렀다.참으로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 이들이었지만, 싱 목사 부부의 뜨거운 정성에도 불구하고 이 늑대 소녀들은 인간으로까지의 복귀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발견된지 얼마 후, 큰 소녀 ‘가마라’는 죽고 말았다. 이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 닦치고 있는 자연환경의 변화를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지금 우리 인간은 하나의 무모한 실험을 하고 있다. 그것이 무모하다고 하는 이유는, 이 실험결과에 따라 너무도 막대한 생태계의 변화가 관계되기 때문이다.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 인간인들 어찌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 인간은, 발전과 개발의 논리를 내세우며 무서운 속도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고속 성장에 따른 대기와 토양의 환경 파괴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가고 있다. 오늘의 강산은 이미 수십 수백 년 전의 강산이 아닐 뿐더러 앞으로도 별다른 개선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얼마 후 우리 후손들은 마음놓고 뛰어다닐 산과 들 그리고 강과
바다를 잃게 될 것이다.
“야생동물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인간에게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라는 말은 미국 듀크대학의 동물 생리학자 너트 슈미트 박사의 말이고,
“이제라도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가 없다면, 인간의 미래에는 재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는 말은 미국 뉴 햄프셔대학의 저명한 미래학자 데니스 메도우스 박사의 말이다.
그래도, 발전이라는 단어가 국가간의 정책종목이 된 지금의 현실에서 ‘환경보존’이라는 구호는 아득히 멀기만 할 뿐이다. 이제 남은 건 그저 인간이 가진 적응력에 의존하는 행운 뿐인 것 같다. 극심하게 오염된 환경을 이기고자, 몸에 털이라도 나든가, 네 발로 기든가 하던 늑대 소녀들이 보여준 능력처럼, 폐 속에 공해물질 자동필터라도 생기든가, 안 먹고 살든가 하는 등등의 놀라운 적응력 발휘로 살아남는 그 행운 말이다. 이제 우리 모두 환경을 깊이 생각할 때다.

하나라도 작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패전국이 된 독일은 전국토가 초토화가 되어 절망 상태에 놓였지만, K. 아데나워(1876-1967)라는 현명한 지도자와 함께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 지금과 같은 경제대국으로까지 발돋음할 수 있었다.
73세라는 고령에, 폐허가 된 조국과 기아에서 헤매이는 민족을 떠맡게 된 아데나워 수상은 그 동안 자신이 일생 동안 지녀온 온건•신중•심사숙고•확신에 찬 행동으로 이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다. 그는 지방법원 서기의 넉넉치 못한 가정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마음껏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자랐지만 부모님을 조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성품이 온건하고 착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품행이 방정하고 모든 과목에 열심’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자진해서 포기하고 은행의 견습사원이 되어야 했다.
‘열심히 일하면 이곳에서도 대성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큰 포부를 갖고 출근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 맡겨지는 일은 의외로 간단한 일들 뿐이었다. 가장 먼저 출근해서 커튼을 젖히고, 유리창을 닦고, 바닥을 청소하고, 서류함에서 장부를 꺼내고……, 이 뿐만이 아니라 선배들의 아침 커피를 준비하고, 이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우체
국이나 매점을 오가고…….
청년 아데나워는 이러한 실상을 파악하자, 자신의 미래에 의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지금과 같은 은행 생활이라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좀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충분한 조사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은행에서 중요한 지위까지 오르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를 알아 보았다. 대답은 비관적이었다. 그는 신문사까지 찾아가 이 사실을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청년 아데나워는 이 결과를 토대로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그는 드디어 은행 생활을 마감하고, 아버지와 상의해 법률공부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신중하고도 확신에 찬 행동들이, 그는 물론 패망국 독일까지 오늘의 자랑스런 모습으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한 사람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단 한 사람이라 해도 그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닌 것이다.

밀물 때는 반드시 온다

어느 사장실에, 별로 잘 그려진 것 같지 않은 그림이 가장 중요한 자리에 걸려 있었다. 그 그림에는 낡은 거룻배 한 척이 그려져 있었는데, 주위에는 아무렇게나 노가 놓여져 있었고, 때마침 썰물 때 그린 그림인지라 분위기는 쓸쓸하고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림 밑부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밀물 때는 반드시 온다.”
지금은 썰물 때라 이렇듯 생기 없는 처절한 모습이지만, 언젠가 밀물이 몰려오면 활기찬 모습이 될 거라는 의미를 담은 내용이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어째서 저 그림이 저곳에 걸려 있느냐고 묻자, 사장은 진지한 모습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세일즈맨이었던 젊은 시절, 저는 말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것만 같았고, 나의 일을 방해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야말로 고통의 나날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어떤 할아버지 댁을 업무차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 저는 저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 쓸쓸하고 황막한 배경이 어찌도 그리 내 매마른 심정과 같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저 글을 발견하고는 마음을 가라앉히게 되었죠. 그리하여 저는‘내 인생에서도 언젠가는 밀물 때가 온다.’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고, 그 후 희망을 갖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저 그림을 제게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그 할아버지의 배려와, 내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저 그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곳에 걸어 놓은 것입니다. 또, 저의 아픈 추억도 잊지 말자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마음이 괴로울 때 저 그림을 보면서, 절망을 희망으로, 부정을 긍정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사장이 이 그림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행운이라면, 우리 모두도 행운아가 될 기회는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꼭 그림은 아니었을런지는 모르지만, 책이나, 영화나, 연극이나, 이야기에서, 한두 번쯤 깊은 감동에 빠져 충격을 받았거나 눈물을 흘렸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사장이 끝까지 행운아가 된 것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
회를 놓치지 않고 절묘히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도 가능성에만 머므르지 말고, 지나간 기억을 되살려, 이제라도 진짜 행운아가 되어 보자.

지식과 지혜

재학 시절에 필자가 어느 공대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별난 강의, ‘지식과 지혜의 차이’에 대한 설명은 지금도 머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교수님은 그 차이를 우선 이렇게 설명하셨다.
「지식은 책이나 경험을 통해 얻는 ‘안다’는 사실을 말하지만, 지혜는 그렇게 해서 얻어진 지식들을 사리에 맞게 적용시킬 줄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말로써는 이해가 부족하겠다 싶었던 그 교수님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예를 들어 그 차이를 설명하셨다.
「여기 가로가 3cm, 세로가 2cm인 직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간단한 문제 하나를 생각해 봅시다. 이 문제는 ‘가로×세로=직사각형의 넓이’라는 공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 답이 ‘3×2=6(cm²)’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공식만 적용시켜 답을 구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지식만 있는 사람이지 지혜로운 사람은 못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이렇게 풉니다. 문제에서 ‘주어진 조건’은 무엇이냐?, ‘구하라는 목표’는 무엇이냐?, 그리고 ‘어떻게 해야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느냐?’의 3가지 단계를 적용시켜 푼다는 것입니다. 잘 알겠지만, 이 문제에서 ‘주어진 조건’은 가로의 길이 3cm와 세로의 길이 2cm입니다. 또 ‘목표’는 직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으로는 ‘직사각형의 넓이=가로×세로’라는 공식과 그래서 ‘3×2=6’이라는 정확한 계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학생 여러분, 이해가 충분히 되었습니까?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은 문제의 연속이고 우리는 그 문제를 푸는 해결사입니다. 문제를 푸는데는 공식과 같은 지식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보다는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능력, 즉 지혜가 더욱 필요합니다. 어찌보면 여러분이 이미 획득한 지식만으로도 이 세상을 사는데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교수님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지식은 암기된 내용과 같은 ‘많고 적음’의 대상이고, 지혜는 그것들을 적용시키는 ‘능력의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교수님이 예로 들은 직사각형의 문제를 놓고 볼 때, 초등학교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도 이 세상의 상당한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로버트 풀검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까지 썼을 것이다. 한 마디로 지식(학력)보다는 지혜(응용력)를 늘리라는 얘기일 것이다.

쇼의 익살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극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버나드 쇼(1856-1950)는, 독설•익살•해학•위트 분야에서 많은 얘기를 남겼다.
어느 날 쇼가 거리에서 동료 작가인 G.K. 체스터턴(1874-1936)을 만났다. 쇼는 말라깽이였고 체스터턴은 뚱뚱보였다. 체스터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을 보면 지금 영국이 기근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군요.”
“그렇지. 그러나 그 원인은 자네 때문이 아니겠나? ”
어느 여배우가 쇼를 붙잡고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당신의 그 우수한 두뇌와 나의 이 아름다운 육체를 이어받을 아기가 태어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어요?”
“그럴 것도 같군요. 그러나 당신의 그 두뇌와 나의 이 육체를 가진 아기가 태어나는 것도 생각해 보았소?”
어떤 사람이 쇼에게 물었다.
“당신이 새 친구는 잘 만나면서 옛 친구는 잘 만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 그건 어려서부터 알던 사람의 늙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늙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허영심 많은 부호가 많은 손님들을 초대한 후, 자신의 그림을 자랑하며 말했다.
“저는 이 그림을 어떤 공공기관에 기증하고 싶습니다만, 어디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예, 그러시다면 맹아학교에 기증하세요,”
쇼는 결혼이란 인간이 만든 가장 방종한 제도라며 50세까지 결혼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기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금요일에 결혼한 사람은 불행해진다는 말이 있는데, 당신도 이 말을 믿으십니까?”
“물론입니다. 어찌 금요일이라고 예외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교도소 입구에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을 하자!”
그러자 쇼가 중얼거렸다.
“이 글을 교도소 안에 있는 사람은 못 보겠군.”
버나드 쇼의 이 익살들은 그아말로 쇼처럼 재미있지만, 단순히 그냥 웃어 넘길 얘기들만은 아닌 것 같다.

메기는 필요 없다

논에서 미꾸라지를 양식할 때, 미꾸라지만 단순히 양식하는 것보다 거기에 메기 한 마리를 넣어 양식하면 더욱 통통하고 기름진 미꾸라지를 얻는다고 한다.
이유인즉, 아무런 적이 없는 미꾸라지들만의 집단은 전혀 위기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활동량이 적어지고, 그러다 보면 결국은 먹이섭취도 충분치 못해져 나약하고 병든 미꾸라지가 되는 반면에, 메기와 함께 놓여진 미꾸라지들은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열심히 도망다녀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먹이 섭취도 많아져 결국에는 건강하고 통통한 미꾸라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미꾸라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인간 역시 위기의식이 없다 해서 반드시 좋아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부유한 집 자녀들 중에 문제아가 적지 않고, 신분 보장이 보다 확실해질수록 점점 더 적극적으로 되어간다는 사실들이 바로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인간에게도 메기와 같은 외부의 강요된 위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풍토를 마련하자. 외부의 강요된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스스로 최선을 다해 보자.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지라, 자의에 의해 스스로 일할 때보다 타인의 강요에 의해 일할 때 더 많은 고통도 느끼고 상처도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이다.
사실, 위기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평소에도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여 최선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가. 발등에 떨어지는 불처럼 눈앞에 나타난 것만이 위기는 아니다. 독재자나 무능한 지도자가 생겨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을 허용하는 어리석은 국민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세상에서 자신이 할 일은 의외로 많다. 자신의 당면한 일은 물론이고, 미래를 위한 백년대계를 세워 실천하는 일이 그렇고, 나아가 이웃과 인류를 위한 일까지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가장 훌륭하게 산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으로 스스로의 삶에 충실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이제 우리도 그런 삶을 추구해 보자!
어른들은 오늘이 자신의 최후의 날인양 진지하게 일하고, 아이들은 오늘이 인생의 첫 날인양 멋진 계획을 세워 실천하자. 선생님은 이 수업이 마지막 수업인양 강의하고, 학생들은 내일이 시험 날인양 열심히 공부하자. 우리에게 메기는 필요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자는 얘기다.

자전거 타기

독일의 초등학교 교과과정에는 ‘자전거 타기’라는 교과목이 있다. 학교 선생님은 이 교과목을 통해 학생들에게, 교통법규, 자전거 타는 법, 그리고 자전거의 구조 및 수리까지 가르쳐 준다.
그 교과과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 몇 주 동안은 교통신호를 익히기 위해 신호등과 각종 표지판을 숙지하도록 한다. 이 때 학생들은 신호등과 각종 표지판을 직접 그려보기도 하고, 선생님과 함께 거리에 나가 직접 확인도 하면서 교통신호를 완전히 익힌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전거의 원리, 부품의 기능 및 특성을 배우는데 직접 자전거를 분해까지 해보면서 매카니즘을 익힌다. 이런 사전 교육을 충분히 받은 후에야 드디어 자전거 타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 때 자전거 예절도 함께 배워 자전거를 실제 운전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운전자가 지켜야 할 본분도 배운다. 간단할 것 같은 ‘자전거 타기’도 이렇게 긴 과정을 거쳐 배우는 것이다.
이들의 ‘자전거 타기’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이들과 다른 ‘발상’과 ‘개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전거를 배운다’ 할 때는 보통, ‘자전거 타는 기술’만을 생각할 뿐 거기에 교통법규나 자전거 예절, 그리고 자전거의 구조나 수리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좋은 의미에서 이것은 ‘본질 추구에 강하다’는 뜻도 있겠지만, 자전거를 타면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결코 현명한 방법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에 더욱 그렇다.
어찌 자전거 뿐이랴! 자동차 운전도 그렇고 집짓는 일 또한 그렇다. 심지어 청소하는 일도 그렇다. 충분한 안전설계 없이 지은 건물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교통사고 세계 제1위’, ‘부실공사 제1위’라는 오명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본질추구의 졸속행위가 빚어낸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기초부터 착실하게 배우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한다. 운전을 배우는 사람에게, 신호등과 교통예절, 그리고 기능이나 간단한 수리를 이해하는 일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청소하라!’는 얘기에는, 걸레로 더러운 곳만 치우라는 얘기가 아니고, 걸레를 깨끗이 빨아서 처음의 제자리에 놓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청소예절인 것으로써 이미 ‘청소하기’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인 것이다.

열여섯번째

천하제일이 되려면

마타주라라는 청년은 천하제일의 검객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유명한 검객 반조에게 찾아가 이렇게 물었다.
“제가 지금부터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천하제일의 검객이 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물론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10년.”
반조의 대답은 짧았다.
“아버님은 늙으셨습니다. 10년이 지나기 전에 저는 집으로 돌아가 아버님을 봉양하고 싶습니다. 제가 노력을 두 배로 한다면 그 때에는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
“30년.”
반조의 대답은 여전히 짧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는 10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노력을 두 배로 하는데 어찌 30년이 걸립니까? 저는 정말로 열심히 배울 겁니다. 얼마나 걸리는지 정확히 알려 주십시오. ”
“70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짜증을 내는 마타주라에게, 반조가 짧게 설명했다.
“그렇게 서두르는 녀석은 천천히 배워야 돼!”
그 말에 마타주라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는 시간에 대한 아무런 약속도 없이, 반조의 제자가 되기로 했다. 그 날부터 그의 고행은 시작되었다. 나무하기, 장작패기, 밥짓기, 설거지하기, 마당 쓸기, 정원 가꾸기, 등등의 검술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온갖 궂은 일뿐이었다. 칼이나 검술에 대해서는 이야기조차 해보지 못한채 3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
어느 날, 그 날도 역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원 일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반조의 목검이 날아오더니 그의 몸을 강타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때와 장소의 구분도 없이 반조의 기습적인 목검이 날아왔다. 처음에는 얻어맞기만 하던 마타주라도 시일이 지나자 조금씩 피하기 시작했다. 얼마마한 시간이 다시 흘러, 이제 반조의 목검은 허공만 스치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천하제일의 검객으로 손색 없는 몸놀림을 갖게 되었고, 그러자 스승 반조가 그를 불러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나친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원하던 목표를 4년만에 달성했던 것이다.
목표에의 지나친 집착은 과욕에 불과하다. 욕심이 지나치면 냉정함을 잃는다. 큰 사람이 되려면, 사물과 사태에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끓어오르는 온갖 욕망을 다 떨쳐낸, 무욕•무심의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배우는 기술은, 간단히, 정말 간단히 배워지는 것이다.
인격연마가 90%요, 기술은 10%뿐이라고 감히 제언한다.

행복의 중심

게으른 아들을 둔 늙은 농부가 있었다. 그는 부지런히 포도밭에 나가 일을 했지만 아들은 조금도 거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안된다는 아버지의 말에도 아들은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른 봄 어느 날, 늙은 아버지가 드디어 숨을 거두게 되면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 동안 너에게는 숨겨왔다만 이제는 말해 주겠다. 사실 포도밭에는 네가 쓰기에 충분히 많은 보물이 묻혀 있다. 나는 그것을 많이 찾아내었는데 너도 그것을 많이 찾아내어 행복하게 살도록 해라.”
아버지가 죽자, 아들은 그 보물이 탐나 포도밭 구석구석을 열심히 뒤졌다. 그러나 보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리 파 보아도 보물을 찾을 수 없었던 아들은 결국 파던 일을 멈추고 말았다.
그런데 가을이 되자 포도밭에서는 예년에 보지 못하던 큰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아들이 여름 내내 포도밭 여기저기를 파느라 잡초들이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아들은 아버지가 말한 그 보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버지가 말한 보물이란, 찬란한 금은 보화가 아니라 포도라는 열매였던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알찬 포도를 많이 거둔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더 깊은 뜻인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매일매일의 성실한 삶이었을 것이다. 오늘 씨앗을 뿌리고, 내일 잡초를 걷고, 모래 비료를 주고, 글피 병충해를 방제하고,……,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매일매일이 바로 보물처럼 값진 행복일 테니 말이다.
이러한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을 수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뿌린 씨앗에서 내일 당장 열매를 기대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과욕일 뿐이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고, 그 과정이 충실하면 당연히 결과도 좋아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다운 행복이란 것도, 손에 알찬 포도를 잡는 그런 결과의 짧은 순간이 아니라, 그 알찬 포도를 수확해 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의 긴 기간이 되는 것이다. 농부가 포도를 수확하는 순간은 짧고, 그 포도를 가꾸는 시간은 길다는 사실에서, 행복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농부 아들의 포도밭은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일터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의 일터에서 저마다의 성실한 삶을 일구어 행복이라는 보물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만년청춘

독일의 음악 작곡가 브람스(1833-1897)가 50회 생일을 맞은 어느 날이다. 그 즈음 그는 무언가 머리를 맴도는 악보 하나를 그려 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떠오른 생각을 오선지 위에 그려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 꾸겨버리기를 몇십 번, 그는 마침내 붓을 동댕이치며 이렇게 한탄했다.
“이젠 나도 끝인가 보다. 예전과 같은 영감도 없고 총명함도 사라졌구나. 나이 50이 되면 이렇게 늙어 쓸모없어지는가.”
이렇게 자조하는데, 문득 하나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것은 며칠 전 친구로부터 식사나 함께 하자며 약속했던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것이었다. 브람스가 그 집에 도착해 보니 의외로 많은 친구들도 함께 와 있었다. 브람스는 오랫만에 많은 친구들을 만나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이윽고 모두 식탁에 둘러앉자 주인 친구가 말했다.
“각자 자기 잔을 잡고, 오늘 50회 생일을 맞은 친구 브람스를 축하해 줍시다.”
브람스는 감격했다. 자신은 작곡 때문에 생일도 친구도 잊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에게 모든 친구들이 함께 축하해 주니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내가 나이 50이 되었다고 작곡을 그만두려 했던 생각은 잘못이었다. 50이든 무어든 죽는 날까지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맹세하며, 친구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했다.
인생 50이면, 젊은 시절에 비교해서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이를 불문하고 그가 맹세한대로 죽는 날까지 열심히 일해서 <교향곡 제4번 마단조>(52세)등의 명곡과 <11개의 코랄 전주곡>(63세)을 남겼다.
미켈란젤로가 80세에, 모네가 85세에 대작을 남겼다든가, 처칠, 맥아더 등등이 나이에 관계없이 죽을 때까지 일했다는 사실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많고 또 당연한 것이다.
이제 늙었기 때문에 지나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적어져 ‘시간의 가치’가 더욱 소중해졌다는 사실이 그렇고, 그 동안 이렇게 저렇게 해서 모여진 축적된 경험과 경륜이 사장될 확률도 높아졌다는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인간들이 자랑하는 오늘날의 문화나 문명도 따지고 보면 조상들의 축적된 지식 덕분이 아닌가?)
그리고 후손들에게 보여줄 또 하나의 값진 교훈인 ‘유종의 미’를 보여줄 수 있고, 스스로 열심히 일함으로써 ‘만년 청춘’도 구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공부

어느 한국 유학생이 외국에서 낙제를 했는데, 그 유학생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런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공부가 어렵다 함은 말해 무엇하겠느냐?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면서 방황도 하고 어려움도 많이 겪었던 것이니,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3천 년 전, 중국의 강태공이라는 사람은 30세에 산 속으로 들어가 40년간을 수도하며 공부하다가 70세가 되어서야 하산하였는데 그리고도 큰 일을 많이 하였단다. 또, 오늘날 시성이라 추앙받는 이태백은 젊어서 10년 공부를 작정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공부하던중, 6년이 지나자 자신의 천재적 기질을 믿고 하산하려 하였는데 도중에서 커다란 쇠절굿공이를 바위에 갈고 있는 노파를 만났단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태백이 그 사유를 물으니, “10년을 갈면 바늘이 된다네.” 하고 대답하기에, 자신의 짧은 생각을 부끄럽게 여기고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 나머지 4년을 다채운 끝에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란다. 학문을 함에 있어 서두름은 금물이다. 마음을 한 가지로 먹고 기초부터 차근차근히 토대를 쌓도록 하여라! 매사를 신중히 처리하고,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라!」
이 유학생 어머니는 84세까지 사셨는데, 그 때까지 책읽기를 즐겼다고 한다. 어머니의 독서열이 이렇게 훌륭한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다. 유학생은 마침내 대학교수가 되었다. 세계의 어머니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어머니는 유대인의 어머니라고 한다. 유대인의 어머니는, 자식을 잘 가르치고, 지혜를 사랑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2천 년 동안 나라 없는 망국민으로 세계 각지를 유랑하였지만, 끝까지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과 민족혼을 지키며 독립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어머니의 교육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도 유대인의 어머니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자식 교육열’과‘지혜’에 관해서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어머니 자신의 공부’는 소홀한 면이 있다(아버지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식의 성공을 정녕 바라는 어머니라면, 자식 앞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 주어야 한다. ‘공부하는 어머니’의 모습보다 더 좋은 모범이 없고, 더 무서운 충고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자식은 반드시 성공하게 된다.

물질의 유해성

긍금증이 많은 어떤 유대인이 랍비를 찾아가 물었다.
“랍비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그렇습니까?”
“예, 가난한 사람들은 별로 가진 것이 없는데도 서로 열심히 도우며 살아가는데, 부자들은 풍족하게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시 생각하던 랍비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맑고 투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유리라도 뒷면에 은 칠을 한 거울을 바라보면 오로지 자기 자신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은이라는 물질이 유리의 투명성을 막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질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 물질로 인하여 본래의 투명성을 잃게 된다는 얘기다. 물질은 투명성을 잃게 하는 성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약과 같은 중독성의 성질도 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더 갖고 싶어하니 말이다. 우리가 보기에 충분히 많은 물질을 소유하여, 그래서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인데도 전혀 그렇게 살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9억 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아직도 옆 사람의 1억 원에만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많이 필요한 것만도 아니다. 쓸 줄도 모르고 모으기만한 돈 때문에 오히려 파탄에 이른 사람들도 너무나 많다. 무작정 버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질에 중독된 환자에 불과하다.
물질에는 침투성도 있다. 물질에 한번 잘못 빠지면, 사람들은 그 편리함과 쾌락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는 패가망신이라는 불행 속에서 헤매이고 만다. 무절제한 생활, 사치, 허영, 투기, 놀음, 과시욕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이 또한 물질로 인한 비참한 결론이다. 우리가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서, 투명성도 잃지 않고, 중독도 되지 않고, 타락도 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이 주는 이러한 위해성을 미리 잘 파악하여, 어려운 이웃과 함께 나누며 살아간다면, 오히려 가진 만큼 더 많은 행복을 차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왜' 그리고 '언제'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또한 그것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여래(해탈한 부처)는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하는가, 사라지는가?
붓다의 제자 한 사람은 이상의 4가지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가, 끝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스승에게 달려와 물었다. 그는 이 문제를 물으면서, 스승도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면 수행을 당장 때려치우고 환속해 버리겠다는 엄포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에 붓다가 말했다.
「어느 마을에서 청년이 독화살을 맞았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즉시 화살을 뽑으려 하니 청년이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 한다.
“화살을 지금 뽑지 마시오. 누가 그 화살을 쏘았는지 안 후에 뽑을 것이오. 그래야 책임을 묻지 않겠소? 왜 내게 쏘았으며, 어디에 살며, 얼굴은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가 쏜 활은 작은 활인지 큰 활인지, 활줄은 소 힘줄인지 사슴 힘줄인지, 화살 재료는 갈대인지 대나무인지, 화살촉은 소 이빨인지 사자 이빨인지, 화살촉 모양은 칼 모양인지 창 모양인지 등등의 내용도 모두 알아야겠소.”
이렇게 엉뚱한 소리만 지껄이던 청년은 그 동안에 퍼진 독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얘기가 끝나자 붓다가 제자에게 물었다.
“너는 이 이야기의 청년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그는 확실히 어리석은 사람이다. 문제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중요하지 않은 얘기만 하다가 귀한 생명을 잃은 것이다. 너도 마찬가지다. 쉽게 얻어지지 않는 문제에만 집착하다가 정작 중요한 수도생활을 게을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해탈의 기회를 잃지나 않을까 염려가 된다.”
붓다의 이 말에 제자는 크게 깨우치고 수행에 힘써 마침내 해탈했다고 한다. 어떤 문제에 대하여, 원인규명을 철저히 하고, 심층탐구하는 자세는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도 ‘당면한 문제’인가를 밝혀낸 다음의 일이다. 그 어떤 문제라도 풀어야 할 시기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왜’ 그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 풀어야 하는지를 알아 보는 일이야 말로, 원인규명• 심층탐구• 해결책보다 앞서 풀어야 할 선결 문제인 것이다.

관포지교(管鮑之交)

「손 뒤집으면 구름되고 다시 엎으면 비가 되니,
어지럽고 경박한 세상인심 헤아릴 길 없어라.
그대는 모르는가, 관중과 포숙의 그 깊은 사귐을!
요즘 사람들 우정 저버리길 흙 버리듯 하네.」

≪고문진보≫에 실려있는 두보의 <빈교행>이라는 시다. 두보는 이 시대에서, 우정의 귀감이 되는 관중과 포숙을 예로 들어, 세간의 이해 득실만을 생각하는 천박한 친구 사귐을 꾸짖고 있다. 이들 두 사람의 우정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어 보자.
두 사람은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하여 서로를 잘 아는 이들은, 가난할 때나 부귀할 때나, 어려울 때나 좋을 때나, 변치 않는 우정을 나누어 지금까지 만인들에게 칭송받고 있다. ≪사기≫에 적혀 있는 이들의 우정 이야기는 이렇다.
「나는 전에 가난해서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포숙의 허락없이 내 몫을 많이 취하곤 했지만, 그는 나를 욕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때 포숙을 위한답시고 사업을 시작한 일도 있었는데, 그 사업이 실패하여 오히려 그를 망치게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사업에는 시운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일찍이 임금에게 세 번씩이나 불려가 벼슬을 했지만 매번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그 때마다 나를 못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직 때를 못 만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 나는 세 번이나 전쟁터에 나갔지만 세 번 모두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나를 비겁하다고 꾸짖지 않았다. 내게는 봉양해야 할 늙은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 내가 모시던 왕자가 포숙이 모시던 왕자와 제후 자리를 놓고 경쟁하다가 실패하여, 왕자와 나의 동료는 죽고 나만 구차스럽게 살아남아 생명을 유지할 때도, 그는 나를 수치심 모르는 사람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추천해 나의 명성을 날리게 해주었다. 내가 작은 절조보다는 천하에 공명을 내지 못함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나를 낳아 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세상에서 나를 알아 준 사람은 포숙이다!」
한없이 어진 포숙은 물론이고, 그것을 잊지 않고 이런 뜨거운 찬사로 답한 춘추시대 최고의 재상 관중에게도 또한 존경을 아니 보낼 수 없다.

신사와 소년

“할아버지! 전차가 왔어요. 할아버지께서 먼저 전차에 오르셔야 저도 오르지요.”
“아이쿠, 미안하구나.”
신문 읽기에 열중하다 차례를 놓칠뻔한 나이 많은 신사가 소년에게 이렇게 말하며 전차에 오르자, 뒤의 소년도 이어 전차에 올랐다. 나란히 자리를 잡은 이들은 얘기를 나누었다.
“얘야, 아까는 고마웠다. 그래 너는 어디 사는 누구니? 또 몇 살이니?”
“예, 저는 런던 공항 근처에 살며, 이름은 조오지라고 해요. 나이는 열두 살이고요.”
“음, 매우 똑똑하구나.”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년이 말했다.
“할아버지 이름과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그래, 내 이름을 알고 싶으냐?”
“그럼요. 상대방의 이름과 나이를 물었으면, 당연히 자신의 나이와 이름도 알려 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그래, 네 말이 맞다. 내 이름은 맥밀란이고, 나이는 예슨아홉이란다.”
“맥밀란 할아버지라고요? 그럼 수상 할아버지 이름과 똑같네요.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얼굴은 수상 할아버지와 많이 닮았어요. 혹시 수상 할아버지 아니세요?”
“허, 너는 정말 똑똑하구나. 그래 내가 바로 그 할아버지다. 그러나 며칠 전 수상을 그만두었으니 이제는 수상이 아니지.”
소년은 이 할아버지가 어른들에게 존경받는 수상 할아버지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는 또 이렇게 물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며칠 전까지 수상으로 계시던 분인데, 왜 전차를 타세요?”
이에 맥밀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오지의 귀에 대고 이렇게 나직이 말했다.
“조오지야! 아무리 수상이었다 해도 그 자리를 떠나면 시민이란다. 수상에 있을 때는 일이 중요해서 좋은 차를 탔지만, 이제는 시민과 똑같이 전차를 타야 하지 않겠니?”
영국의 H. 맥밀란(1894-1986)이 1963년 수상직을 사임하고 며칠 뒤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에게도 이제는 이런 멋쟁이 지도자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불안의 확인

전쟁 분위기가 고조될 때, 입대 영장을 받아들고 불안에 떠는 한 친구에게 똑같은 처지의 다른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우리에게 적어도 한 가지를 일깨워 준다.
“나는 너처럼 그렇게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설혹 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방으로 가게 될 것이냐, 아니면 후방으로 갈 것이냐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후방으로 가게 된다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또 설혹, 전방으로 가게 되더라도 아직 두 개의 가능성은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전선에 직접 투입되어 부상을 당하느냐, 아니냐일 것이다. 여기서도 부상을 당하지 않는다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고, 부상을 당하더라도 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가벼운 경상이냐이고, 다른 하나는 중상이냐일 것이다. 이 때, 경상을 입는다면 또한 문제가 없고, 중상을 입는다 하더라도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은 아직도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중상으로 인해 죽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는 경우일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도, 만일 죽게 된다면 더 이상의 아픔으로 인한 고통도 사라질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그 반대 경우라도 또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확률적으로 2%에 불과한 일이다. 그러니 어떤 결과가 닥쳐오더라도 미리 걱정하며 불안에 떨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지나친 논리 비약으로 허구적 내용 같은 이야기지만, 그래도 이 점 하나는 배워야 한다. 그것은 ‘불안에 대한 실체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는 일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실 여러 가지 문제로 얼마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죽음, 질병, 출세, 미래, 자녀,……,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젊은이처럼 그 불안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본다면, 우리의 힘 밖에 있어서 막을 수 없는 것이거나,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을 허구의 것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닥칠 불안에 대한 최선과 최악의 결과를 미리 예측하여, 최선의 결과에 대해서는 희망과 자긍심으로, 최악의 결과에 대해서는 유비무환과 체념의 자세로 살아가는 지혜를 가져야,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고백

「나와 같은 불행한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이제 모든 얘기를 털어 놓겠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무척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오직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가 고작이었습니다. 5학년이 될 때까지 미술시간에 그림 한 장 그려보지 못했습니다. 도화지도 없었고 물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누가 내게 신경을 쓰겠습니까? 선생님으로부터 칭찬 한번 들어보지 못했고 학생들로부터는 조롱과 멸시만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술시간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는 나에게, 여선생님이 다가와 내 모습을 보시고는 옆 자리 학생의 스케치북에서 도화지 한 장을 뜯어 주셨습니다. 그 넓은 도화지에 나는 평생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물감이 없어서 색칠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끝날 무렵 선생님께서는 나의 그림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잘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구도도 매우 좋다. 여기다 물감까지 칠한다면 정말 훌륭한 그림이 되겠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칭찬을 듣고 나는 물감을 구해서 그림을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 나는 그림을 들고 집으로 뛰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그 그림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두 분 모두 남의 집에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녁 늦게야 두 분이 돌아오셨습니다. 나는 두 분을 반갑게 맞이하고는 그 그림을 자랑스럽게 보이며 물감을 사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피곤한 두 분은 나의 얘기에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감도 사주지 않았습니다.
다음 미술시간이 있던 날,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물감을 훔치다 들켰습니다. 주인에게 죽도록 매를 맞고는 학교에 끌려가 벌을 받았습니다. 집에 가면 부모님에게 매를 맞을까 두려워서 나는 그 날 밤 거리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거리를 방황하다가 결국은 도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물건을 훔치다 주인에게 들켰고, 엉겁결에 주인을 칼로 찌르고 살인자까지 되어 이렇게 사형대에 오른 것입니다.
그 여선생님이 그립습니다. 그 때 우리 부모님이 내게 물감을 사주었다면, 어쩌면 지금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될 수도 있었는데…….」
대형사고와 대형사건이 유난히 많았던 어두운 95년이었다. 그러나 희망을 가질만한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95년에 새겨진 모든 아픔의 추억도, 이 사형수의 안타까운 마지막 고백과 함께 세모에 묻어버리고 희망찬 새해를 준비해 보자.

열일곱번째

살아있는 가정교육

한 선비가 한양을 다녀오다가 나루터에서 이웃마을 친구 외아들을 만났다. 선비는 배에서 내렸고 외아들은 그 배에 올랐다. 배에서 내려 얼마를 걷던 선비가 산언덕에서 잠시 쉬며, 강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그 배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게 웬 일인가! 갑작이 배가 뒤집어지더니 배도 사람도 삽시간에 모두 강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너무 놀랐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크게 탄식하다가 이내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친구는 사실, 조정에서의 꽤 높은 벼슬도 마다하고 고향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며 살아가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찾아오니 그는 기뻤다. 즐겁게 친구를 환영하며 술상과 안주를 준비시켰다. 그럴수록 선비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그래도 도저히 숨길 수 없어 선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방금 목격한 사실을 얘기했다.
“저,……자네 아들이 강물에 빠져 죽었다네. 내가 워낙 멀리 있어서 도울 수도 없었고……,
그 못되 먹은 사공이 어찌 그리 많은 사람을 태우던지…….”
선비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죄이기도 한 양 말을 맺지 못하며 사공을 원망했다. 외아들의 아버지는 선비의 얘기를 조용히 들었다. 지극히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던 아버지는,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얘기에서 눈가에 가벼운 경련을 보이더니 이내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친구가 들려주는 마지막 얘기에 귀를 세우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얘기를 빨리 들려 주어서 고맙네. 그러나 너무 걱정 말게. 내 아들은 살아 돌아올 걸세. 그러니 술이나 들며 오랫만에 얘기나 나누세.”
선비는 친구의 이 태연한 모습에 크게 놀랐다. 그가 평소에도 인격 높은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데도 태연하기만 하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정신이 돌아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조차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죽었던 외아들이 지금 막 문을 열고 들어와 두 사람에게 조용히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너무도 놀라 친구 아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예, 어르신을 뵙고 저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사공이 정원 이상으로 손님을 태우기에 그만 내렸습니다. 평소 저의 아버님께서는 “위험은 스스로 피해야 한다.”라고 제게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을 좇아 따랐을 뿐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가정교육이 아니겠는가.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의 행동에 경탄을 금치 못할 뿐이다.

최고의 명약

오래 전 영국에 올리버 골드스미스라는 인정 많은 의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병원문을 열심히 두드리며 남루한 차림의 한 부인이 찾아와 그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선생님, 제 남편 좀 살려 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어요.”
“부인, 진정하십시오. 남편께서는 어디가 그렇게 편찮으신가요?”
“음식을 통 못 먹어요. 진작에 선생님을 찾아뵈려 했지만 워낙 가난해서 찾아올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아주 심각한 것 같아서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어요. 선생님, 제발 한번만 도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부인. 그렇다면 환자를 빨리 보러 가야겠군요.”
이렇게 말한 골드스미스는 즉시 왕진 가방을 챙겨 부인과 함께 환자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그 집은 정말 가난한 집이었다. 형편 없이 낡은 집에 이렇다 할 가재 도구도 하나 없었는데, 좁은 방 한가운데에는 뼈만 앙상히 남은 환자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골드스미스는 즉시 환자를 진찰했다. 손목을 잡아 맥박을 재고, 청진기로 환자의 온몸을 열심히 살폈다. 진찰이 끝난 골드스미스에게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 남편의 상태가 아주 심각한가요?”
“부인, 남편께서는 그렇게 심각한 상태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일, 제가 약을 준비해 놓을 테니 병원에 오셔서 받아 가십시오. 내일 꼭 오셔야 합니다.”
골드스미스는 이렇게 한 번 더 당부하며 병원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부인이 병원을 찾아왔을 때, 골드스미스는 미리 준비해 둔 약상자를 건네 주며 말했다.
“부인, 이 약상자는 반드시 집에 가셔서 열어 보아야 합니다. 남편께서 이 약을 복용하시면 틀림없이 완쾌되실 테니 그렇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부인은 집에 돌아와 약상자를 열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골드스미스가 준 그 약상자 안에는 약이 아닌 돈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용의 편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남편의 병은 잘 먹지 못해서 생긴 영양실조입니다. 이 돈으로 무엇이든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들게 하십시오. 그러면 완쾌되실 겁니다.”
부인은 골드스미스의 그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격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영양실조에는 돈이 약’이라는 골드스미스의 처방은 정말 기막히게 훌륭한 처방이 아닐 수 없다. 그 병에는 어떤 약보다도 돈이 가장 효과적일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골드스미스를 최고 명의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 역시 가난한 불우 이웃들에게 돈이라는 그 ‘최고의 명약’을 투입해서, 또한 최고 명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의 질문

공자가 동쪽 어느 나라에 갔을 때, 두 어린이가 길가에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서로 자기의 주장이 옳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공자가 아이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희들은 무슨 일로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며 다투느냐?”
한 아이가 먼저 나서서 대답했다.
“예, 하늘의 해가 하루 중 언제 땅에서 더 가까운지를 얘기하다가 이렇게 다투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너는 하루 중 언제가 해와 땅이 더 가깝다고 생각하느냐?”
예상밖의 화제에 공자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예, 저는 해가 처음 떠오르는 아침이나 지는 저녁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침이나 저녁때는 해가 크게 보이고 낮에는 작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체가 가까이 있으면 크게 보이고 멀리 있으면 작게 보이므로, 해도 떠오를 때나 질 때에 더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아이가 즉시 반박했다.
“아닙니다! 해는 한낮이 땅과 더 가깝습니다. 해가 처음 뜰 때나 질 때는 서늘하고 하늘 한복판에 오면 뜨겁지 않습니까? 이것은 열이 있는 물체가 가까이 있을 때는 뜨겁고 멀리 있을 때는 차갑다는 이치에서 볼 때, 한창 뜨거운 한낮의 해가 서늘한 아침•저녁의 해보다 더 가까이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공자가 두 아이의 설명을 모두 들었으나 저마다 일리가 있는지라 쉽게 판정하지 못했다.
이 얘기를 듣고 보니, ‘공자님도 3살 아이한테 배운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또한 아이들이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또렷한 주장을 한다는 사실도 놀랍다. 참으로 똑똑하고 당찬 아이들이다.
사실, 아이들 중에는 이렇게 난해한 질문을 잘 하고 자기 주장이 또렷한 아이들이 있다. 이런 아이들은 호기심과 탐구심이 많아서 어른들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자주 던진다. 그러면 이 때 당황한 어른들은 우물쭈물해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아이들의 궁금증이 해소될 때까지 차분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확실히 모르는 내용이라면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대답해 주고, 백과사전을 펼쳐 함께 해결해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라도 그 해답을 알려 주어야 한다. 당장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에는 기록해 두었다가 나중에라도 해결해 주어야 한다.
도덕•윤리•철학•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최상의 우등 점수를 받은 공자님도 단순한 착시현상으로 아침 저녁의 해가 커 보인다는 것(실제 사진 촬영을 해 보면 아침 저녁의 해나 낮의 해의 크기는 같다.)이나, 지구의 자전과 공전 현상 때문에 지구가 차가워지고 뜨거워진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해 당황해야 했다.
따라서 우리도 모르는 사항에 대해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과학과 문명이 발달된 이 시대에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이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썩은 사과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다. 환경이 깨끗해지면 마음도 깨끗해지고, 환경이 더러워지면 마음도 더러워진다.
그것은 향을 싼 종이에서 향 냄새가 배어 나오고, 생선을 묶은 줄에서 생선 냄새가 풍겨 나오는 이치와도 같다. 환경의 힘은 이렇게 크고도 절대적이어서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착하고 고분고분하던 아들이 동네 불량배들과 어울리면서 갑자기 변했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깊은 번민 끝에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아버지는 시장에 나가 먹음직한 사과 몇 개를 산 후, 바닥에 버려진 썩은 사과 하나를 주워 그 속에 함께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거실 탁자 위 과일 바구니에 옮겨 놓았다. 밤늦게 집에 돌아온 아들이 바구니 속의 사과를 보자 군침을 당기며 다가갔다. 그러나 그 속에 썩은 사과도 함께 들어 있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니, 왜 썩은 사과를 이 좋은 사과와 함께 놓았어요? 그러면 좋은 사과도 함께 썩어 버릴 텐데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얘야, 나는 지금 바로 그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란다. 네 말처럼 썩은 사과 하나가 좋은 사과 모두를 썩게 하는지, 아니면 그 반대로 좋은 사과 여러 개가 오히려 썩은 사과 하나를 좋게 만드는지 말이다.”
아버지의 이 대답에 아들은 기가 막혔다.
‘아니, 아버지가 그 정도도 모르시다니!’
며칠이 지나서 그 썩은 사과 하나로 인해 다른 모든 사과들이 썩어 버렸다. 이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버지의 사과 실험은 완전 실패로군요. 그 썩은 사과가 좋은 사과를 모두 썩게 했으니 말이에요.”
그러자 아버지가 정색을 하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네 말대로 썩은 사과 하나가 좋은 사과 모두를 썩게 했다. 그러니 너도 이제는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단 하나의 썩은 사과로도 여러 개의 좋은 사과가 모두 썩는데, 네가 나쁜 친구를 많이 사귄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니?”
아들은 그제서야 아버지가 왜 좋은 사과와 썩은 사과를 바구니에 함께 넣었는지 알게 되었다.
하나가 열을 이기는 것이 악의 특성이다. 한 독의 음료수를 구정물로 만드는 데는 단 한 숫가락의 오물이면 충분하고, 십 년 공들여 지은 건물을 사라지게 하는 데는 성냥불 하나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처럼 악의 생명력은 일방적으로 강한 것이다. 이것이 이 <썩은 사과> 이야기의 교훈으로써, ‘자녀들의 좋은 환경 마련’을 위해 부모들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쫓고 쫓기는 세상

장자가 어느 날 숲 속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검은 물체 하나가 다가와 이마를 스치더니 앞의 큰 밤나무로 향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장자가 몸을 피한 뒤 그 물체를 자세히 보니 한 마리의 까치였다. 이에 장자가 혼자 중얼거렸다.
‘참 한심한 까치로군. 이 넓은 숲에서 하필이면 사냥꾼인 나를 스치나. 그러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면서 밤나무 가지에 앉은 까치를 다시 한번 보니 그 행동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 까치가 지금 막 온 몸을 집중시키며 자신의 먹이인 사마귀를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마귀도 자신의 먹이인 매미를 노리며 천적인 까치가 뒤에서 자신을 노리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까치도 사마귀도 오직 자신의 먹이에만 눈이 팔려, 자신의 뒤에서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천적에게는 전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일련의 모습들을 확인한 장자가 또다시 탄식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미물들이로구나! 자신의 먹이를 잡겠다는 생각에만 빠져, 바로 그 순간 자신을 노리는 천적에게는 온통 무방비로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던 장자가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어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는데, 이게 또 웬일인가. 이번에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정 하나가 도끼눈을 부릅뜨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화난 얼굴로 달려들어 장자를 내동댕이치는 것이 아닌가.
“멀쩡하게 생긴 놈이 남의 밤나무에 눈독을 들여! 너 같은 밤 도둑놈 때문에 매년 농사를 망치는 거야! 이제 내가 너의 그 못된 도둑놈 심보를 고쳐 주겠다!”
그러면서 장자를 발로 마구 차며 때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장자는 그 사나운 장정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수십 번이나 되풀이하고서야 겨우 그 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세상의 온갖 이치를 깨우친 장자가, 그것도 정신 없이 쫓고 쫓기는 미물들의 현장을 목격하며 그 미물들의 어리석음을 개탄하던 도중에, 또다시 자신의 뒤에서 자신을 노리는 장정에게 망신을 당했다는 이 이야기는, 이야기의 재미를 넘어 세상사의 무서움을 한껏 느끼게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연속적인 먹이사슬’의 무서운 현장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쫓고 있는 대상은 또 다른 대상을 쫓고 있으며, 그 대상은 또 다른 대상을 정신 없이 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먹이를 쫓느라 정신 없이 앞만 노려볼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도 나를 먹이 대상으로 삼아 나의 뒤를 노리는 그것을 확인해야 되지 않을까? 저마다 지금 당장, 자신의 뒤를 돌아다 보며 그것을 확인해 보자.

행복해질 수 있는 마음

붓다의 제자 부루나가 서쪽의 야만국인 수로국으로 전도하러 가겠다며 붓다를 찾아왔다. 붓다가 부루나에게 물었다.
“부루나야! 그 나라 사람들은 사납고 흉폭하여 남들에게 몹쓸 짓을 예사로 한다는데, 너는 그 나라 사람들이 너를 욕하고 창피까지 줄 때 어찌하겠느냐?”
“예, 그들이 저를 욕하고 창피 준다 해도, 그들 마음 한 구석에 아직 착한 마음과 지혜가 있어 손이나 돌로 저를 때리지 않는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손이나 돌로 너를 때리면 어찌하겠느냐?”
“세존이시여, 설령 그들이 손이나 돌로 저를 때린다 해도, 칼까지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기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럼 칼로 너를 해치면 어찌하겠느냐?”
“그래도 그들이 아직도 저를 죽이지 않는 착한 마음과 지혜 있음에 감사하며 기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루나야! 이제 그들이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세존이시여! 그럴 경우에도 저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도를 닦는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도 고통스러운 육체가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있사온데, 착하고 지혜로운 그 곳 사람들이 저의 썩어빠진 육체를 죽임으로써 저를 이 세상 모든 고뇌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에 대해 기뻐할 것입니다.”
이 말에 붓다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부루나야! 너는 그 동안 도를 착실히 닦더니 어느 틈에 ‘행복해질 수 있는 마음’을 터득했구나. 그런 마음이라면 서쪽 수로국에서도 능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어서 가서 그들을 전도하여라.” 그 후 수로국으로 간 부루나는 5백여 명의 신자를 얻고 절까지 지음으로써 전도의 목적을 훌륭히 달성했다고 한다.
한평생을 내내 남에게 양보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도 순진해서 주변의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 곁에는 항상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가는 인생입니다. 양보할 것이 있다는 말에는 아직도 무언가를 더 가지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행복해질 수 있는 마음도 이와 같은 끝없는 양보 속에서 ‘마음의 안정 찾기’였을 것이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자, 그가 곧 행복한 자이다.

알 때까지 읽으면, 문제가 쉬워진다

독일의 천재 수학자 P.G.L. 디리클레(1805~1859)는 정수론•급수론•수리물리학의 여러 분야에서 지대한 공적을 남긴 사람이다. ‘디리클레급수’, ‘디리클레문제’라는 용어가 말해 주듯이,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해서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이렇게 학문적으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그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그것도 소년 시절부터 보여준 특유의 끈기 때문이었다. 소년 시절에 있었던 그의 다음 이야기가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12살 때 그가 용돈을 모아 수학책을 샀다. 그리고 그 책을 열심히 읽었다. 아들의 이 행동을 대견하게 여긴 어머니가 물었다.
“얘야, 너는 그 어려운 책을 정말 이해하는 거냐?”
그러자 소년 디리클레가 총명한 두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모르죠, 그러니까 알 때까지 읽는 거죠.”
이 얼마나 훌륭한 대답인가. 우리가 아는 천재는 사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 어떤 모르는 것도 알 때까지 읽는다면 세상에 모를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그들의 노력은 무시한 채, 그들이 소유한 지식의 양으로 그의 천재성을 칭송하기만 한다면, 사실은 그들을 모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의 9살 소녀가 시험날 학교에서 돌아왔다. 어머니가 물었다.
“얘야, 오늘은 무엇을 배웠니?”
“예, 공부를 많이 하면 시험 문제가 쉬워진다는 것을 배웠어요.”
이 또한 얼마나 훌륭한 대답인가. 문제를 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 어려운 문제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문제를 모르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의 공부 부족을 말해 주는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문제가 어렵게 느껴지면 그만큼 자신의 공부 부족을 인정하고 공부를 더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문제가 쉽게 느껴질 정도의 수준에 도달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안다. 그러나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문제가 어렵다는 말로 책임을 전가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문제가 어렵다고 느껴질 때마다 자신의 공부 부족과 경험 부족을 인정하자! 그러면 발전할 수 있다! 시험에서 몇 점을 받았느냐보다는, 비록 이번에는 틀렸지만 다음에는 그것을 맞추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인생 문제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인생 문제에서도 지금은 실패했지만 다음엔 실패하지 않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시험 문제든 인생 문제든 일단 알고 나면 쉬워진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따라서 앞의 두 소년•소녀의 이야기를 합친 내용, 즉 ‘알 때까지 읽으면 문제가 쉬워진다’는 결론이야말로, 성공은 물론 천재도 될 수 있는 확실한 명언이기도 한 것이다.

애도를 흠모로

옛날 어느 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중년의 아들이 늙으신 아버지를 잃고 크게 상심하여 식음까지 전폐하며 매일 애도만 했다. 그도 모자란 아들은 마당에 석탑까지 세워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몸이 수척해져서 몰골이 말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 아들의 근심 또한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아들이었기에 감히 나서서 말리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아들은 이런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는 며칠 전 죽은 소의 무덤을 찾아가, 그 앞에 풀을 갖다 놓고 무덤을 향해 어서 일어나 그것을 먹으라고 소리쳤다. 괴이하게 생각한 마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지금 당신 아들이 죽은 소의 무덤에 풀을 갖다 놓고 어서 일어나 먹으라고 소리칩니다. 아무래도 아들이 이상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아들 있는 곳으로 급히 달려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이 소는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 어떻게 일어나서 풀을 먹는단 말이냐?”
그러자 아들이 얼굴에 슬픈 빛을 가득 띄우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제가 이렇게 슬퍼하는데도 소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나요?”
아버지가 즉시 깨달았다.
“오, 내 아들이 내게 깨우침을 주는구나. 그래, 이제는 나도 더 이상 너의 할아버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겠다. 그러니 너도 그만 일어나거라. ”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로써, 바로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효성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오히려 불효가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오는 비통함이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 그토록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태도는 오직 판단력의 결핍을 말해 줄 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하루 빨리 잊고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슬픔을 딛고, 남아 있는 사람을 위해 두 배로 열심히 일해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가 정녕 바라는 것으로써 진짜 효도일 것이다.
감정을 자제하여 애도(죽음을 슬퍼함.)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그것을 흠모(마음 속 깊이 사모함.)하는 마음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야말로,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우리 국민들이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숙제이다.

사람의 머리값

옛날 인도에 아주 겸손한 임금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체 높은 임금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머리를 잘 숙여 온 국민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신하 한 사람은 임금의 그런 행동은 권위 없는 행동이라며 말렸다.
“폐하! 사람의 신체 중에는 머리가 가장 소중한 것처럼 나라에서는 임금이 가장 귀하옵니다. 그런데도 지체 높으신 폐하께서 아무에게나 머리를 쉽게 숙이시면 신하들이나 백성들은 오히려 불편과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차후에는 이를 삼가하여 주소서!”
임금은 신하의 이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 그 신하를 불러, 미리 준비해 둔 고양이 해골과, 말 해골과, 사람의 해골을 건네 주며 이런 명령을 내렸다.
“이 세 개의 해골을 궁 밖으로 갖고 나가서 팔아 보시오.”
신하는 임금의 명령대로 그것들을 가지고 궁 밖으로 나와 팔기 시작했다.
고양이 해골이 맨 처음 팔렸다. 그것이 있으면 쥐가 없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말 해골이 팔렸다. 그것을 문에 매달아 놓으면 병이 사라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해골만은 쉽게 팔리지 않았다. 아무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하는 마지막 남은 사람의 해골을 팔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민가를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그것에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을 하며 냉대를 했다. 결국, 신하는 그것을 팔지 못한 채 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신하를 보며 임금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 경은 내게 사람의 머리가 제일 소중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보니 고양이 머리나 말 머리보다도 못하지 않소?
대체로 사람의 머리가 귀하다 함은, 그 머리에 간직된 생각이나 마음 그리고 지식을 말하는 것이지 머리 자체는 아닌 것이오. 이제 그 사실을 알았으면 단순히 권위나 체면만 내세우지 말고 남에게 머리를 많이 숙이시오.”
임금의 이 충고에 신하가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품위와 권위를 내세우며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수록 머릿속은 비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은 품위나 권위가 스스로 주장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행동 그리고 인품과 품성들로 하여 이미 상대방에게 결정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고양이나 말의 머리보다도 못하다는 우리의 머리를 너무 꼿꼿이 세우려 하지 말고, 남과 자신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고개 숙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품위와 권위는 물론 존경까지도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사공과 학자

공부를 많이 한 학자가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강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학자는 나룻배를 타야 했다. 나룻배에는 다른 손님이 한 명도 없어서 사공과 학자 두 사람만이 강을 건넜다.
강의 3분의 1쯤을 지날 때 학자가 사공에게 물었다.
“당신은 문학을 배웠소?”
“웬 걸요. 저 같은 뱃사공이 언제 문학을 배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인생의 3분의 1을 헛살았소.”
“……”
나룻배가 강의 절반쯤을 통과할 때 학자가 사공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은 철학을 배웠소?”
“아니오!”
“그럼 당신은 인생의 절반을 헛살았소.”
사공은 역시 말이 없었다.
나룻배가 얼마를 더 나아가 강의 3분의 2쯤을 통과할 때, 때마침 갑작스러운 돌풍이 일며 배가 몹시 흔들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공이 학자에게 물었다.
“학자님께서는 수영을 배우셨나요?”
“아니오. 나는 아직 수영을 안 배웠소. ”
“그렇다면 학자님은 인생 전부를 헛사셨군요.”
이렇게 말한 사공은 심하게 출렁이는 강물로 뛰어들어 거친 물살을 유유히 헤치며 강을 건너가 버렸다.
그러나 문학에도 철학에도 그렇게 해박하다는 학자는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었다. 필요한 것은 어려움이나 위기 앞에서 사용되는 산 지식이지 책상 앞에서 외운 무용지물의 죽은 지식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식의 획득 못지 않게 지식의 활용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실제로 활용되는 지식이 곧 산 지식이기 때문이다.
많이 배운 학자들만 지식을 잘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작게 배웠더라도, 그것을 적시에 그리고 적소에 배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지식의 활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지금의 갈증에 필요한 것은 세상 가득한 모든 물이 아니라, 오직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한 잔의 물’이라는 표현과 뜻을 같이 한다.
학자들은 서재에서 공부하면서 겪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경험을 통해 지식의 활용 의미를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겪는 수많은 실패 경험을 통해 또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역시 그들처럼 뜻있는 일을 많이 해 낼 수 있다.
위의 <사공과 학자>의 이야기에서도 보았듯이, 강물에서는 뱃사공의 수영 실력만이 오직 산 지식이었다. 학자님의 그 도통하다는 문학•철학 실력은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의 죽은 지식이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만의 지식을 적시 적소에 활용한다면, 때때로 그리고 곳곳에서 아주 의미 있는 승리를 많이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열여덟번째

행동하기 전에

가을이 되자 과수원의 배밭에 어른 주먹만큼이나 큰 배가 탐스럽게 익었다. 그런데 수확을 앞두고 밤마다 배 서리꾼들이 설치는 바람에 배밭 주인의 속은 터질 지경이었다.
여름 내내 정성을 기울여 이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얄미운 서리꾼들이 나타나 그 꿈을 망치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화가 날대로 난 주인은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집에 있던 공기총까지 꺼내 와 서리꾼을 보면 당장 쏘아 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달빛도 없는 깜깜한 밤에 주인이 배밭을 순찰하던 중, 저 멀리서 배 서리를 끝낸 듯한 한 검은 물체가 지금 막 울타리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쫓아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생각한 주인이 어깨에 맨 공기총을 내려 방아쇠를 당길 자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 물체의 크기가 어른이 아닌 소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소년에게 자기의 이 행동은 지나치다는 것을 느끼며 슬그머니 총을 내려 놓았다.
집에 돌아온 배밭 주인에게 아내가 유난히 반겼다.
“여보, 이 배 좀 드셔 보세요. 아주 잘 익었어요”.
아내는 탐스럽게 잘 익은 배를 깎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이 배는 어디서 난 거요?”
“우리 아이가 이제는 다 컸나 봐요. 너무도 대견하네요. 아 글쎄, 가장 잘 익은 배는 그 동안 고생하신 아버지가 잡수셔야 한다며 조금 전에 우리 배밭에서 따오지 않았겠어요?”
“뭐! 조금 전 우리 배밭에서 따왔다구? 그렇다면 그 서리꾼이 바로 우리 아이였잖아!”
너무도 놀란 남편이 이렇게 소리치며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감정을 억제하고 다시 한번 생각했던 일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의 사랑하는 자식을 구할 수 있었다. 사실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바로 이런 내용들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이든 그것을 실천하기 전에 많이 생각해야 하지만, 그 행동을 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다시 한 번 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감정에 약한 우리 민족은 행동이 지나치게 우발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점 역시 앞으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화가 나도 참고 끝까지 한번 더 생각하는 한국인, 이런 한국인이 바로 끈기와 인내의 위대한 한국인이다.

돈으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세상 사람들은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돈이 있기 때문에 더욱더 많은 문제가 생기고 고통도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돈 없는 사람의 문제는 고픈 배 하나 채우는 눈에 보이는 문제인데 반하여, 돈 있는 사람의 문제는 욕망이라는 드넓은 세계에서 여러 사람과 얽히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잘 아는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즐겨 하곤 한다.
“돈이 있어 무얼 하겠습니까? 그것으로 죽은 사람을 불러올 수가 있습니까? 시간을 사서 과거로 되돌아갈 수가 있습니까? 환자의 고통을 대신할 수가 있습니까? 가슴 속 답답한 한을 지울 수가 있습니까?
보약을 먹으면 몸에 좋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또 얼마나 효과가 있겠습니까? 보약이 그렇게 좋다면 갑부들은 왜 죽었으며, 의사들은 왜 죽었겠습니까?
내 나이 이제 50에 원하는 것이라고는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나 좀더 자세히 알았으면 하는 것인데, 이 주제가 너무 거창하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라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하였으면 하는데 그게 무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은 생각지 않고, 아직도 부족하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를 바보라 웃고, 나는 그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나 봅니다.”
이 분의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런지는 알 수 없다. 또 이 분의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의 이 글은 이 분이 못다한 말을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좧돈이 있으면, 침대는 살 수 있어도 잠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책은 살 수 있어도 지식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음식은 살 수 있어도 입맛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장식품은 살 수 있어도 아름다움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약은 살 수 있어도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쾌락은 살 수 있어도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십자가는 살 수 있어도 구세주는 살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절은 지을 수 있어도 극락은 살 수 없습니다.좦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는 게 돈이지만, 사실 그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들은 그렇게 중요한 것들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돈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들이 정말 중요한 것들인 것 같다.
돈, 그것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면 정말 쉬운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에 너무 쉽게 목숨을 걸며 아까운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조경의 충고

조경의 충고
바른 말 잘하는 관중추부사 조경이 어느 노대신의 집에 초대를 받고 그 집을 방문했다.
노대신에게는 느즈막히 얻은 어린 손자 하나가 있었는데, 노대신이 이 손자를 너무도 귀여워한 나머지 아이가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어 버릇이 아주 나빴다. 아무에게나 다가가 기어오르고 수염을 잡아 당기고 어른들에게 상스러운 욕까지 하는 등, 참으로 예의라고는 찾아볼 곳이 없는 망나니 아이였다. 아이가 이렇게 잘못 컸는데도 노대신은 아이를 나무라기는커녕 껄껄 웃으며 즐거운 표정을 짓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칭찬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어른을 무서워하지 않고 능히 욕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의 기상이 범상치 않다는 증거요. 이런 남다른 패기와 기상이 있으니 장차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킬 것이 분명하오.”
그 때까지 이런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조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노대신에게 정색을 하며 말했다.
“어린 아이의 심기란 아직 굳지 못하여 종아리를 때려 가며 어른을 공경하라고 가르쳐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과 같이 남을 모욕하는 행동을 그대로 방치했다가 그것이 완전한 버릇이 되면 어쩌시렵니까? 그 결과를 상상해 보셨습니까?
집안에서는 공경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하여 불효자식이 될 것이고, 집 밖에 나가서는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망나니가 될 것이고, 나라에 두려운 사람이 없다 하여 세상을 만만히 보지 않겠습니까? 두려운 것이 없으니 악을 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조경의 이 말에 노대신이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의 뜻있는 사람들은 지금의 가정을 일컬어, 자녀들에게 무엇이든지 다 해 주는 ‘만만한 아빠와 엄마’만 있고, 지도하며 이끌어 주는 ‘바람직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는 시대라고도 한다. 훈계와 지도보다는 격려와 자유를 주장하는 서양식 교육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자녀 교육은 이 중 어느 한쪽이 완전히 무시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격려가 지나치면 분별력과 겸손함을 모르게 되고, 자유를 잘못 가르치면 방종과 타락을 얻게 될 것이다. 반면에, 훈계를 통해서는 자제력과 인내심을 배우게 되고, 지도를 통해서는 바른 길과 타협정신을 배우는 긍정적인 일면도 있다.
요즘과 같이 너그러운 부모만 있고 엄한 부모가 없는 시대에서 조경의 충고가 자못 새롭게 들리는 이유는, 각 가정마다 흔들리는 자녀들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가을이 되자 과수원의 배밭에 어른 주먹만큼이나 큰 배가 탐스럽게 익었다. 그런데 수확을 앞두고 밤마다 배 서리꾼들이 설치는 바람에 배밭 주인의 속은 터질 지경이었다.
여름 내내 정성을 기울여 이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얄미운 서리꾼들이 나타나 그 꿈을 망치고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화가 날대로 난 주인은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집에 있던 공기총까지 꺼내 와 서리꾼을 보면 당장 쏘아 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달빛도 없는 깜깜한 밤에 주인이 배밭을 순찰하던 중, 저 멀리서 배 서리를 끝낸 듯한 한 검은 물체가 지금 막 울타리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쫓아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생각한 주인이 어깨에 맨 공기총을 내려 방아쇠를 당길 자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주인은 그 물체의 크기가 어른이 아닌 소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소년에게 자기의 이 행동은 지나치다는 것을 느끼며 슬그머니 총을 내려 놓았다.
집에 돌아온 배밭 주인에게 아내가 유난히 반겼다.
“여보, 이 배 좀 드셔 보세요. 아주 잘 익었어요”.
아내는 탐스럽게 잘 익은 배를 깎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이 배는 어디서 난 거요?”
“우리 아이가 이제는 다 컸나 봐요. 너무도 대견하네요. 아 글쎄, 가장 잘 익은 배는 그 동안 고생하신 아버지가 잡수셔야 한다며 조금 전에 우리 배밭에서 따오지 않았겠어요?”
“뭐! 조금 전 우리 배밭에서 따왔다구? 그렇다면 그 서리꾼이 바로 우리 아이였잖아!”
너무도 놀란 남편이 이렇게 소리치며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감정을 억제하고 다시 한번 생각했던 일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의 사랑하는 자식을 구할 수 있었다. 사실에 대한 진위 여부를 떠나,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바로 이런 내용들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이든 그것을 실천하기 전에 많이 생각해야 하지만, 그 행동을 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다시 한 번 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감정에 약한 우리 민족은 행동이 지나치게 우발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점 역시 앞으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화가 나도 참고 끝까지 한번 더 생각하는 한국인, 이런 한국인이 바로 끈기와 인내의 위대한 한국인이다.

아름다운 프로포즈

아름다운 프로포즈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인 모세 멘델스존의 결혼은 불리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극적인 성공담이었기에 아름다운 향기를 남긴다.
그는 곱사등이로 키도 남달리 작았고 얼굴도 잘생긴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여인들이 그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가 함부르크에 있는 한 상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프룸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여인을 알게 되었다. 모세는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는데, 그것은 차라리 절망적인 사랑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를 그런 안타까운 사랑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프룸체 역시 그의 기형적인 모습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모세는 용기를 내어 프룸체에게 접근해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녀에게 더욱더 깊은 비애를 느껴야만 했다. 몇 차례 대화를 시도했지만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세는 마침내 모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지막 대화를 시도했다.
“당신은 결혼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맺어 주는 일이라는 사실을 믿나요?”
프룸체는 여전히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러는 당신도 그것을 믿나요?”
모세가 대답했다.
“예, 믿습니다. 한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신이 찾아와 장차 그의 신부가 될 여자를 알려 준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에도 신이 찾아와 나의 신부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이런 말씀을 한 마디 더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아내는 곱사등이일 것이다.’
나는 그 때 그 자리에서 소리쳤답니다.
‘안 됩니다, 신이시여! 여인이 곱사등이가 되는 것은 비극입니다. 차라리 저를 곱사등이로 만드시고 신부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이렇게 돼서 나는 그 처녀 대신 곱사등이로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프룸체가 드디어 고개를 돌려 모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어떤 아련한 옛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듯 모세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살며시 다가와 모세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웃었다. 훗날 그녀는 모세의 헌신적인 아내가 되었다.
이런 현실을 초월한 순애보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들려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는 프룸체가 모세에게 속았다거나, 모세가 프룸체를 속였다는 따위의 너무도 현실적이고 통속적인 계산서만 열심히 작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은 일로 큰 불행 막기

작은 일로 큰 불행 막기
중국의 고전 《한비자》에 있는 이야기이다. 은나라의 법률에 ‘재를 길에 버리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에 공자의 제자 자공이 이것은 지나친 중벌이 아니냐고 스승에게 물었다.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결코 중벌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법의 정신을 충분히 이해한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재를 길에 버리면 바람에 날려 지나가는 사람의 옷에 묻을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람은 화가 나서 재를 버린 사람과 싸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사람이 싸우게 되면 그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싸우게 될 것이고, 그 아내와 자식까지도 함께 싸우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이들 모두는 결국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재를 길에 버린 단순한 행위 하나 때문에 양쪽 3대가 해를 입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재를 길에 버리지 못하게 함은 당연한 일이다.
재를 길에 버리지 않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것으로 하여 앞으로 생겨날 수 있는 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
공자의 이 설명은 현대 법 개념으로 보면 모든 사람을 예비 범죄자로 보는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그런 딱딱한 법 해석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시중에는 이와 유사한 일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주차 문제로 인해 이웃간의 벌이는 싸움을 들 수 있다. 다정해야 할 이웃들이 이 문제로 인하여 집단 가족 싸움을 벌여 원수지간이 되기도 하고, 폭행 사건까지 일어나 양가 모두 불행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다른 사연의 폭행 사건이나 살인 사건도 그 원인이나 이유는 아주 사소한 것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들이 처음부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양보하는 자세를 취했던들 이런 큰 불행한 사태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고 쉬운 일에 소홀하다가 결국 큰 불행을 당하고 만 것이다.
횡단보도에 푸른 신호등이 켜져 있는데 무조건 달려나가는 운전자들도 마찬가지다. 야간에는 특히 심하다. 이런 운전자의 앞날에는 뻔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를 들이받고 큰 불행을 당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인은 물론 사랑하는 가족에게까지 극심한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
재 하나를 못 버리게 해서 3대의 불행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듯이, 법규에 맞게 주차하고 운전하는 행위는 모두 작고 쉬운 일에서부터 큰 불행을 막아보자는 현명한 대안이다. 우리 모두 이런 현명한 사람이 되어, 가족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신용의 척도가 그 사람의 인격

신용의 척도가 그 사람의 인격
영조 때 정승 정홍순(1720~1784)은 호조판서로 10여 년을 재직하면서 국가 재정을 빈틈없이 처리한 강직한 재정관이었다. 그는 한 번 약속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는데,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는 신용 없는 사람이라 하여 싫어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 어느 날이었다. 왕이 동구릉에 행차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구경을 갔다. 그는 비가 올 것에 대비하여 갓모를 두 개 준비했는데,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혹시 필요할지 몰라서 준비한 여벌의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매사에 빈틈없이 완벽했던 사람이었다.
때마침 구경 도중에 비가 쏟아졌다. 그는 급히 갓모를 썼고, 옆에서 함께 구경하던 낯모를 사람이 비를 맞고 쩔쩔매자 준비해 둔 여벌의 갓모를 그에게 빌려 주었다. 그 사람이 너무나 고마워했음은 물론이다.
구경이 끝나고 헤어질 때가 되었지만 그 때까지 비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정홍순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비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니 댁의 약도를 그려 주시면 집에 돌아가 그것을 반드시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정홍순은 그러라고 기꺼이 말하며 자기 집의 약도를 그려 주었다. 덧붙여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사람의 집도 알아 두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록 그 사람이 갓모를 가져 오지 않았다. 저녁때까지 기다려도 여전히 갓모를 가져오지 않자, 정홍순이 해질 무렵에 직접 그 집으로 찾아가 갓모를 받아 왔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그가 호조판서로 재임하고 있었을 때, 새로 부임한 호조좌랑이 신임인사차 방문을 왔다. 정홍순이 그 신임 좌랑을 바라보니 옛날에 갓모를 빌려가 가져오지 않았던 그 사람이었다. 이에 정홍순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채용하지 않았다.
“그것이 한낱 갓모라 해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네의 신용은 충분히 알 수가 있네. 그런 신용 없는 사람이 어찌 나라의 살림을 맡아 공정히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용이 자산’이라는 말은 누구나가 다 아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까지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신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나아가 신용의 척도가 그 사람의 인격도 말해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홍순 대감이 그까짓 갓모 하나 때문에 호조좌랑의 직책을 맡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용 없는 사람에게 나라 살림을 맡길 수 없었던 것이다.

손기정 선수와 하퍼 선수

손기정 선수와 하퍼 선수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은 우리에게 잊지 못할 대회이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역사적인 대회였기 때문이다. 가슴엔 비록 일장기가 달려 있었지만, 그래도 이역 만 리 밖에서 벌어진 손기정 선수의 우승은 암울했던 시대에 우리 민족에게 큰 기쁨을 선사한 쾌거였었다. 그런데 손기정 선수가 우승한 이 마라톤 경기에 아주 의미 있는 얘기가 함께 전해지고 있다.
각국에서 엄선된 42명의 국가 대표 선수가 참가한 이 경기에는 최고의 기량을 지닌 선수들이 저마다 강한 우승에의 집념을 불태우며 대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출발 신호가 울리면서 모든 선수들이 힘차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손기정 선수도 선두 그룹에 끼어 무언가 남다른 의욕을 갖고 뛰었다. 그는 이 마라톤 경기를 통해서 나라 없는 식민지 조국과 절망에 빠져 있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영광을 안겨 주고 싶었다.
반환점을 돌 무렵 그는 2등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와 거의 나란히 영국의 하퍼 선수가 달렸고, 저 멀리 앞에서는 최초의 대회 2연패를 노리는 아르헨티나의 자바라 선수가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다.
‘여기서 자바라 선수를 따라잡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손기정 선수는 비탈길인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차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 때 옆에 있던 하퍼 선수가 손기정 선수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뜻은 분명했다. 그것은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손기정 선수는 하퍼 선수가 보내 준 이 무언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내 속도를 완화했다. 그리고 얼마 후 무리하게 앞서 달리던 자바라 선수가 기진맥진하며 기권했고, 그리하여 손기정 선수는 세계 신기록까지 수립하며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 뒤를 이어 하퍼 선수가 2등으로 들어왔다.
경기가 끝난 후, 손을 흔들었던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하퍼 선수가 이렇게 대답했다.
“손기정 선수가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자바라를 따라잡으려고 속력을 내고 있었을 때, 나는 자바라 선수가 이미 과속을 해서 선두를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 때 만일 내가 손기정 선수에게 손을 흔들어 만류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도 쓰러졌을지 모릅니다.”
힘차게 뛰어 조국의 이름을 빛내고 절망 속의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기쁨을 선사한 마라톤 1등의 손기정 선수, 그리고 경쟁자에게까지 선의의 충고를 아끼지 않은 신사도 1등의 하퍼 선수, 이 두 진짜 1등 선수들에게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칼보다 강한 붓

칼보다 강한 붓
관동별곡•훈민가•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송강가사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어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조선 시대의 정철 송강(1536~1593) 선생, 이 분은 문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도 맹활약을 했던 분이다. 그의 빼어난 글솜씨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익히 알려져, 필요할 때마다 사람들이 찾아와 글을 부탁하곤 했다.
어떤 사람의 친구가 평소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말다툼을 하는 도중에 그 병약한 친구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같이 있다가 한 사람이 죽었으니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다급해진 그가 정철 선생을 찾아가 사연을 말하고 고을 사또에게 올릴 소장 하나를 부탁했다.
“대감, 제가 여차여차한 이유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는데, 저의 결백을 증명할 좋은 내용의 소장 하나만 써 주십시오.”
정철 선생이 평소 그의 인품을 익히 아는지라 즉석에서 글을 써 주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좧독한 술이 곁에 있어도 마시지 않으면 취하지 않고,
썩은 노끈이 손에 있어도 당기지 않으면 끊어지지 않는다.좦
그 사람이 소장을 받아 들고 내용을 읽어 보니 자신이 영락없는 범인이라는 뜻이었다. 그가 새파랗게 질려 정철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감님, 어째서 이렇게 저를 죽이는 글을 쓰셨습니까? 제가 정말 그를 죽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정철 선생이 그의 태도를 확인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닐세. 내가 자네를 한번 확인해 본 걸세.”
그리고는 이런 내용의 글로 즉시 바꾸어 주었다.
좧기름 없는 등잔은 바람이 없어도 저절로 꺼지고,
밤나무의 밤은 서리가 안 내려도 가을이 되면 저절로 떨어진다.좦
그 사람이 만족해하며 이 소장을 들고 사또에게 전했다. 사또도 처음에는 현장에 있었던 그를 의심하는 눈치였으나, 정철이 써준 소장을 읽자 이런 판결을 내렸다.
“죽을 사람이 때가 되어 죽은 게로군.”
같은 상황을 정반대되는 두 가지 내용의 글로 표현한 문장가의 빼어난 글솜씨에도 경탄을 금치 못하겠지만, 이렇게 표현하면 살인자가 되고 저렇게 표현하면 무죄가 되게 하는 붓 하나의 위력에서, 실로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남을 것 같다.

인생을 다시 산다면

인생을 다시 산다면
나이 들어 늙은 사람들이나 불치의 병에 걸려 생의 마감을 앞둔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자신들이 행한 어떤 일에 대해 후회하기보다는, 그들이 마음만 먹고 해 보지 못했던 어떤 일들에 대해 더 많이 후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끝내야 하는 절박한 순간에 나온 진솔한 이야기이기에, 아직도 자신의 삶이 영원하다고 생각되는 우리들에게는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보다 나은 삶인가?’를 알려 주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삶을 마쳐야 하는 마지막 순간이 찾아올 것이니 말이다. 그 때 우리는 과연 무슨 말을 들려 줄 것인가?
다음의 시는 어느 노인의 그런 심정을 읊은 내용이다.
좧다음 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리라.
긴장을 풀고 몸을 부드럽게 하리라.
이번 인생보다 더욱 우둔해지리라.
가능한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보다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석양을 더 자주 구경하리라.
산에도 더욱 자주 가고 강물에서 수영도 더 많이 하리라.
실제적인 고통은 더 많이 겪겠지만 공상적인 고통은 가능한 적게 하리라.
나는, 시간 시간을, 하루 하루를 의미 있고 분별 있게 살아가리라.
아, 내가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 (중략)
나는 지금까지 일상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래서 일상적인 것들과 더불지 않고는
어느 곳에도 갈 수 없는 그런 무리 중의 하나였다.
이제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이보다 장비를 간편하게 갖추고 여행길에 나서리라.
…… (후략)좦
인생 선배들의 이런 뜻있는 충고를 외면하고, 그 때 그 상황이 닥쳐와 우리 역시 그들과 똑같은 말밖에 할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완전히 우리의 잘못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이러한 충고를 통해, 지금부터 인생을 새롭게 다시 산다는 각오로 정말 의미 있게 살아야 할 것이다.

걸어온길

1991년에는 대학교수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는 도전을 위하여 생활정보지인 (주)수원교차로를 창업하여, 1995년까지 대표이사로서 회사를 성장시켜 왔다. 1995년부터는 칼럼니스트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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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글긴여운

황필상박사가 우리의 이웃과 후손을 위해 남기신 컬럼을 실었습니다. 고인의 평소 바램대로 우리는 모두가 훌륭한 인격체로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튼실한 기둥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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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년동안 수원 시민들을 대상으로한 창의력개발과 자기계발을 위한 특별강좌가 있었습니다. 이 특별강좌를 통해 황필상박사의 평소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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