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글 긴여운 – 황필상박사의 생전 컬럼 25-29

황필상박사가 우리의 이웃과 후손을 위해 남기신 컬럼을 실었습니다. 고인의 평소 바램대로 우리는 모두가 훌륭한 인격체로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튼실한 기둥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구원장학재단은 고인이 되신 황필상박사님의 뜻을 계승하여 우리의 젊은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지지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스물다섯번째

이적지수

이적지수(耳赤之手)
이적지수라는 말은 바둑 시합에서 ‘(상대방이 놓은 수에 몹시 당황하여) 귀가 붉어졌다’는 데서 유래된 아주 예리한 수를 뜻한다.
일본 바둑 역사에 기성이라 일컬으며 그 재능을 인정 받았던 사람 중에 수책(秀策)이라는 고수가 있었다. 그가 18살 때, 당시 바둑계의 최고봉 정상인석(井上因碩)과 시합을 벌였다. 흑을 잡은 수책이 착점을 시작해서 중반 국면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때, 두 사람의 바둑을 관전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합장 대기 의사가 대국장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었다.
“누가 이 시합에서 이길 것 같습니까?”
“글쎄요, 모르긴 해도 어쩌면 정상인석 선생이 질 것 같군요.”
그런데 그 때까지의 형세는 결코 정상인석에게 불리한 상황도 아니었고, 더구나 그 의사는 바둑에 대해서 이렇다 할 지식도 없는 초보자였다. 그런데도 시합 결과는 묘하게 그의 말대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이 사실에 의아함을 느끼고 의사에게 아까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물었다. 의사가 대답했다.
“나는 바둑은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수책이 127번째 수를 힘차게 놓으니 정상 선생이 그 수를 한참 동안 음미하다가 귀가 붉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정상 선생의 이런 변화는 그가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이렇게 정상 선생의 마음을 동요시킨 수라면 수책이 아주 예리한 수를 두었다고 생각해서 정상 선생이 질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의사의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후 이적지수라는 말은 상대방을 몹시 당황하게 하는 날카로운 수라는 뜻의 말로 남게 되었다.
바둑 실력에서는 초보자에 불과했지만 관찰력에서는 가히 9단의 경지에 이르렀던 그였기에 그런 예측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일법(一法)이 만법(萬法)’이라는 불가의 말과도 일치되는 얘기다. 즉, 한 가지 일에 통달하면 만 가지 일에도 통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의 ‘높은 관찰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만 있다면, 지금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이 복잡한 세상도 한 눈에 꿰뚫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 난해하고 어수선하고 답답한 세상을 간결하고 깔끔하고 시원하게 정리해서 명쾌한 해답까지 찾아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새 마음으로 희망차게 살아갈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높은 관찰력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길가의 무질서한 풀잎 하나에서도 대자연의 위대한 숨결을 듣고(그래서 엄숙한 마음을 갖고), 새봄의 소식을 느끼고(그래서 희망찬 인생을 계획하고),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자신의 부족하고 안일했던 삶에서 이적(耳赤)을 느끼며 분발할 것이다.).

사람이라는 보물

사람이라는 보물
중국의 전국 시대 초기, 제나라 위왕과 위나라 혜왕이 만나 함께 사냥을 나갔다. 혜왕이 위왕에게 물었다.
“귀국의 자랑할만한 보물은 무엇이 있습니까?”
“글쎄요? 어떻게 대답해야…….”
위왕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자 혜왕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수레 12대를 환하게 비출 수 있는 빛나는 구슬이 열 개나 있답니다.”
혜왕의 이 말에 위왕이 실소하며 즉시 받아쳤다.
“아, 참으로 좋은 보물이군요. 그러나 우리나라의 보물은 그런 보석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단자라는 사람이 있어 남쪽 성을 지키니 그로 인하여 인근 초나라 군대가 감히 영토 침범을 생각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반자라는 사람이 있어 서쪽 지역을 지키니 역시 인접한 조나라에서 우리 어장을 넘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검부라는 사람이 있어 북방을 지키니 인근 연나라와 조나라가 우리나라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들 뿐만이 아닙니다. 종수라는 사람이 나라 안에서 도적을 단속하니 치안이 잘 되어 백성들은 땅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를 않습니다.
대왕, 어떻습니까? 이들이야말로 나라 안팎 사방 천 리를 비추는 훌륭한 사람 보물이 아니겠습니까?”
위왕의 이 말에 혜왕이 얼굴을 들지 못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보물이 있다. 금•은•다이아몬드와 같은 빛나는 보석도 있고, 그림•악기와 같은 귀중품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값진 보물들도 사람 보물, 즉 위대한 사람•현명한 사람•의로운 사람과 같은 훌륭한 사람들을 따르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을 것이다.
「일수일확자곡야(一樹一穫者穀也:하나를 심어 하나를 거두는 것은 곡식이다.)
일수십확자목야(一樹十穫者木也:하나를 심어 열을 거두는 것은 나무이다.)
일수백확자인야(一樹百穫者人也:그러나, 하나를 심어 백을 거두는 것은 사람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능성이 큰 것은 사람이며 가치 있는 것도 사람이라는 얘기다.
사람은 정말 중요한 보물임에 틀림없다. 오직, 사람만이 백 배의 결실을 맺고 사방 천 리도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나무도 곡식까지도 못 되는 죽어 있는 보석류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몸에 걸치고 있는 보석은 그만큼의 수치임을 알아야 한다.

기회란 만드는 것

기회란 만드는 것
잔뜩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교장실 앞에 섰지만 첫 날은 허탕이었다. 인사는커녕 교장선생과 대면도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국 사회의 비즈니스 매너는 어떠한 용건이 있을 때는 반드시 전화로 미리 약속을 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걸 알지 못한 채 무작정 찾아간 내가 잘못이었지만, 설령 알았다 해도 뽀족한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전화로 내 의사를 전달할 만한 영어 실력은 되지 못했었으니까…….
그 뒤로도 돈키호테 같은 교장실 방문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교장실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비서인 듯한 직원의 눈치를 살피며 되지도 않는 영어로 몇 마디 청을 해 보기도 했지만 고개만 내저을 뿐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그 때의 경험으로만 얘기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쌀쌀맞고 무정한 사람이 바로 미국 사람이었다. 지나가는 개도 아는 척을 하는 게 우리네 인정인데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밀치거나 면박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떤 반응을 보여 주는 것도 또한 아니었다. 그러니 답답하고 무안한 건 오직 나였다. 분명히 거부 의사를 보이기는 하는데 그게 보는 둥 마는 둥이니 미칠 지경이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아예 무시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들의 무시하는 태도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난 더 뻔뻔해지기로 작정했다. 마냥 주저앉아 교장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도 무료한 노릇이라, 교장실 주위를 슬슬 왔다갔다 하면서 주변 쓰레기도 줍고 둘레둘레 아이들이 수업하는 광경도 훔쳐보았다.
그러기를 한 달쯤, 어느 날 교장실 문이 빠끔히 열리면서 누군가 손짓을 하는데 그 동안 코빼기도 안 내밀던 교장선생이었다. 안경 너머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 분을 자세히 보면서 나는 그만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어, 저 분은 몇 번씩이나 만났던 분이잖아?’
몇 번씩이나 내 곁을 스쳐 지나갔어도 난 그 분이 교장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막상 마주 대하고 보니 그렇게 자상할 수 없는 분이었다.
“미스 킴이라고 했나요. 처음엔 막무가내라 예의도 모르는 사람 같아 꺼렸는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국 여자들은 다 그렇게 당당하고 인내심도 강합니까?”
‘도서출판 아미’ 발행의 《그랜드 마스터》라는 책의 주인공, 김태연 씨의 실화 내용이다. 태권도 8단의 놀라운 실력을 갖춘 그녀였지만,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세상에서 그녀는 이렇게 힘들게 스스로를 개척했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또 하나의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맹활약 중이다. 그녀의 집념 어린 투지와 끈기를 통해서, ‘기회란 찾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니, 참으로 고맙고도 즐거운 일이다

자신 있는 하나의 답

자신 있는 하나의 답
“2분의 1 더하기 2분의 1은 얼마인가요?”
어느 초등학교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분수식을 가르친 후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 한다는 학생이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대답했다.
“2분의 1입니다.”
선생님이 그 학생에게 다시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2분의 1 더하기 2분의 1이라는 뜻은 어떤 것의 절반과 그 다른 절반을 합한다는 뜻이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요.”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한 학생의 입에서 나온 대답 역시 2분의 1이었다. 선생님이 학생을 칠판 앞으로 불러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학생이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1/2+1/2=2/4=1/2”
즉, 분자는 분자끼리 더하고 분모는 분모끼리 더해서 4분의 2가 되고, 이것을 2로 약분하면 2분의 1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학생의 이 주장에 선생님이 밖으로 나가 사과 한 개를 들고 들어와 학생 앞에서 절반을 갈랐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이 두 개의 반 조각 사과를 합하면 몇 개의 사과가 되나요?”
“예, 한 개의 사과가 됩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2분의 1 더하기 2분의 1은 1이 되는 거예요. 이제 알겠어요?”
그러자 학생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예, 이론적으로는 2분의 1이고, 실제적으로는 1입니다.”
이 학생의 대답은 우리의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 깜찍한 대답이 놀랍기만 하다. 왜냐하면 이 학생은 자신의 입장에서 얻어진 최선의 답, 즉 ‘이론의 답’과 ‘실제의 답’이라는 두 개의 답으로 당당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학생은 분수식의 특이한 계산 방법을 몰라 혼동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도 이 학생처럼 이론적인 답과 실제적인 답이라는 두 개의 답으로 대답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예를 들어 아이들이 이렇게 물어 올 때다.
“붉은 신호등일 때는 정지해야 되잖아요?”, “사치와 허영은 망국의 원인이잖아요?”, “폐수를 버리면 환경이 파괴되잖아요?”, “외래어를 남용하면 우리말이 사라지잖아요?”, “뇌물을 받으면 벌 받아야 하잖아요?”, “학연•지연•혈연은 파당을 부른다면서요?”,…….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인지, 부주의 때문인지, 무관심 때문인지, 나쁜 습관 때문인지, 옹졸함 때문인지, 이기주의 때문인지,……. 아무튼 우리는 어린이들의 이 질문들에 대해 하나의 답으로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다. 어서 빨리 하나의 답이 되도록 우리 모두 힘껏 분발해야 할 것이다.

낙관자가 되라!

낙관자가 되라!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며 4시간 동안 녹음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직도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다음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녹음 장비를 들고 비행기에 오르려면 적어도 한 시간 일찍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는 항공사 측의 통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녹음이 예정대로 끝나 나는 부랴부랴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공항의 항공사 직원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3시 비행기는 취소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 직원은 내게 몹시도 미안해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주 잘 된 일입니다.”
“아니,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데 어째서 선생님은 잘 된 일이라고 말씀하시죠?”
도저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예,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3시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 얘기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중 한 가지가 아니었겠습니까? 비행기에 이상이 있었거나, 조종사에게 문제가 생겼거나, 아니면 기상 상태가 나빴기 때문일 겁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그런 조건에서 무리하게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기 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나의 이 말에 그녀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그러나 나는 아직 할 말을 다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비행기는 6시에 출발합니다.”
이번에도 나는 여전히 기뻐하며 말했다.
“아주 잘 된 일입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알 수 없는 분이시군요. 이제 선생님은 이 곳 공항에서 4시간을 기다려야 할 텐데 잘 된 일이라고 말씀하시니 말이에요.”
“아가씨, 그것도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54살인데 아직도 이 도시에서 조용히 4시간을 머문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지금 이 순간 지구상의 곳곳에서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시달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난방이 잘 된 이 곳 공항에서 4시간을 쉴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공짜 사무실을 이용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상황에도,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낙관주의자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낙관주의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세상 모든 시름•걱정까지도 약이 될 테니 말이다. 참으로 기분 좋은 이야기이다.

독립심을 키워라!

독립심을 키워라!
《사회 계약론》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소설가인 J.J. 루소(1712~1778)가 연구에 한창 열중하고 있을 때다.
그는 저녁 때만 되면 산책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 거리 한 모퉁이에서 가난한 절름발이 소년을 만났다. 인자한 루소는 소년이 불쌍하다고 생각되어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주었다. 소년은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고, 그 후에도 루소는 소년을 만날 때마다 잊지 않고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건네 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은 하나의 관례가 되었고, 소년도 이제는 아주 당연한 듯이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년과 마주친 루소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찾았다. 그러나 마침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자 소년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고, 루소는 서운해하는 소년에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 날,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루소는 소년 생각을 많이 했다.
‘참 귀여운 아이다. 어쩌다 그렇게 다리까지 저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는지……. 그런데 나는 소년이 귀여워 날마다 몇 푼씩 돈을 주는데, 그게 정말 잘하는 일일까? 처음 내가 소년에게 동전을 주었을 때는 무척 고마워했는데, 요즈음은 너무도 당연한 듯이 받고 있지 않는가.
나는 그 소년이 정말 귀엽다. 그러나 정말 그 소년을 귀여워한다면 몇 푼의 동전을 쥐어 줄 것이 아니라, 소년의 앞날을 위한 일을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지금 소년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막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루소는 이제부터는 소년에게 돈을 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루소가 소년을 만났을 때, 소년이 평소처럼 루소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선생님, 오늘은 잊지 않으셨겠지요?”
루소가 말했다.
“얘야, 나는 오늘부터 너에게 돈을 주지 않기로 했단다. 그것이 너를 진짜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내가 너에게 돈을 자꾸 주면 너는 그것을 믿고 나에게 의지하려고만 하지 않겠니? 이제는 너도 너의 장래를 위해 네 힘으로 사는 방법을 찾도록 해 보렴. 내 말을 이해하겠니?”
루소가 이렇게 부드럽게 말하자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독립심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동정과 연민의 눈길만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의 장래를 망치는 행위이다.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 서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루소의 소년 사랑 이야기를 요즈음의 젊은 부모들은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살!’과 ‘살자!’

‘자살!’과 ‘살자!’
토끼 마을에서 모든 토끼들이 모여 심각한 내용의 회의를 했다. 한 토끼가 말을 시작했다.
“세상에 우리 토끼같이 불쌍한 신세가 어디 있소? 숲에서는 사냥개가 달려들고, 산에서는 승냥이가 달려들고, 들에서는 매가 달려들어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잖소?”
“그러게 말이오. 지난 밤에는 아랫마을 토돌이가 잠자다가 오소리에게 물려 갔고, 낮에는 토순이가 숲에 나갔다가 여우에게 잡혀 갔소. 매번 이런 심각한 피해를 당하고도 아무 말 못 하는 우리 신세니 이 무슨 서러운 팔자란 말이오.”
또 한 토끼가 따라서 이렇게 맞장구치니 모든 토끼들이 서러워 울고 말았다. 회의장 분위기가 이렇게 비탄에 빠져 있을 때, 한 젊은 토끼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렇게 서럽게 사느니 나는 차라리 연못에 빠져 죽을래요!”
그리고는 즉시 연못으로 달려가 버리니, 모든 토끼들도 같은 심정이 되어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이렇게 무리지어 달려오는 토끼떼를 본 연못가의 개구리들이 크게 놀라 일제히 연못 속으로 ‘풍덩!’ 하고 뛰어들었다.
달려오던 토끼들이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힘없고 나약한 것은 오직 자기들 뿐인 줄 알았는데, 그런 자기들을 보고 놀라는 동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 세상에 우리를 보고도 놀라는 동물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제일 약하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게 말이오. 우리가 제일 약한 동물이 아니라 바로 저 개구리가 제일 약한 동물인 것 같소. 아니, 저 개구리를 보고도 놀라는 물고기들인 것 같소.”
그러자 한 원로 토끼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좌절해 버릴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살아야 하지 않겠소?”
이 소리에 모든 토끼들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다시 토끼 마을로 돌아갔다.
이것은 이솝 우화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 토끼들처럼 오직 자신만이 제일 힘없고 서러운 존재라며 한탄만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강자에게서 분발심을 배우지 않고 좌절감만을 배우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들보다 더 약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다.
그렇다고 자신을 항상 힘없는 약자에게만 비교하며 우쭐거리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곧 자만으로써 역시 좌절만큼 위험한 독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강자에게는 분발심을 배우고 약자에게는 자신감을 배우는 지혜를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여우에 비교하다가 ‘자살!’까지 생각했던 토끼가, 개구리에 비교하여 ‘살자!’로 변했다는 이 이야기는, 글자 하나만 바꾸어 읽어도 전혀 다른 세상이 된다는 사실까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셈이다.

지능을 응용하라!

지능을 응용하라!
장자의 친구인 혜시가 왕으로부터 큰 조롱박 씨를 얻어 울타리에 심었더니, 물이 다섯 섬이나 들어가는 엄청나게 큰 조롱박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러나 크기만 그렇게 컸지 그릇 자체는 너무 약해서 그 어떤 것도 박 속에 담으면 여지없이 깨져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혜시는 그것을 모두 버리고 말았다. 후에 혜시가 장자를 만나 이 조롱박 이야기를 하자, 장자가 이렇게 충고했다.
“송나라에 천을 하얗게 표백하는 일을 가업으로 이어온 사람이 있었다네. 그 집안은 추운 겨울에도 냇가에 나가 손을 담그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식구들의 손이 자주 텄다네. 그러던 중 그 집에서 우연히 손이 트지 않는 약을 발견하게 되었지.
그 소문을 듣고 한 나그네가 찾아와 약의 제조법을 백 냥에 사겠다고 말했다네. 그러자 그 사람은 즉시 가족 회의를 열어 이렇게 말했지.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솜을 표백하는 일을 해 오다가 손이 트지 않는 약을 우연히 발견했소. 그런데 오늘 이 분이 그 약 제조법을 백 냥에 사겠다고 하니 파는 게 어떻겠소? 우리에게는 백 냥의 가치가 그것보다 더 소중하지 않소?’
이렇게 해서 나그네는 약의 제조법을 백 냥에 샀고, 그는 즉시 오나라로 달려갔다네. 그리고는 오나라 왕에게 겨울 동안 병사들에게 그 약을 바르게 해서, 월나라와 수상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게 했다네. 그 결과에 만족한 오나라 왕이 그에게 많은 봉토와 높은 지위를 하사했음은 물론이지.
어떤가? 찬물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그 약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같은 것이었지만,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적용했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른 결과가 생긴 것이 아니었겠나.
그대는 크게 쓰일 물건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네. 자네의 그 다섯 섬이나 들어가는 큰 조롱박은 그 둘레에 그물을 씌워 큰 술통으로 사용했거나 강에 띄워 배처럼 사용했어야 했네.”
이것은 2천 년도 더 되는 옛날 이야기다. 그러나 그 원리, 즉 ‘응용의 방법이 중요하다’는 사실만큼은 지금에도 변함이 있을 수 없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그 적용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를 창출해 내니 말이다.
구멍 하나를 예로 들어도, 누구는 연탄 구멍을 생각해서 수천만 배의 가치를 창출했고, 누구는 바늘 구멍을 생각해서 수백만 배의 효과를 올렸으며, 심지어 설탕 봉지에 바늘 구멍 하나를 생각해서 수억 원을 번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응용의 참뜻을 이런 물체에만 적용시키는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 이상의 것에도 적용시켜야 참다운 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의 지능에 적용시키는 일일 것이다. 지능만큼 부가가치가 높은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당신은 물질적으로도 수억 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고, 또한 정신적으로도 그만큼의 안정 효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국어 공부

국어 공부
어릴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수학 과목과 라틴어 과목에서 더욱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그가 12살 때, 중학교 입학 시험장에서의 일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명문 사립학교에 지원은 했지만, 시험장에서 받아 본 시험지에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라틴어 뿐이었다. 그는 시험지를 받아 들고 우울한 모습이 되고 말았는데, 시험 감독관이 그의 딱한 표정을 보고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힘차게 대답했다고 한다.
“예, 제가 모르는 라틴어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험 감독관과 수험생이 이 소리에 모두 깔깔 웃었다 한다.
그는 이렇게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그 학교 교장선생님이 윈스턴의 아버지인 랜돌프 경을 영국에서 가장 훌륭하고 유능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덕분에, 그에게도 무언가 재능이 있을 것이라 믿어 특별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후에 수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입학 후에도 윈스턴의 라틴어 성적은 줄곧 바닥을 헤매었는데, 그래도 영어 점수만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는 친구들이 자신의 라틴어 성적을 얘기하며 놀릴 때마다 이렇게 대응했다고 한다.
“영국 사람이 라틴어 모르는 것이 그렇게 문제냐?”
그렇다. 영국 사람이 라틴어 못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국어인 영어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사람은 우리의 말인 국어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 나라 사람들은 국어 못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남의 나라 말인 영어 못하는 것이나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로 의사 소통이 된다고 해서 그것이 국어를 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대단한 오해이다. 3살 아이가 사용하는 국어와 1류 시인이 사용하는 국어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어째서 자기 말보다 남의 말을 그리도 좋아할까? 어째서 국어 사전보다 큰 영어 사전을 갖고 있어야 하며, 영어 사전은 열심히 펼치면서 국어 사전은 그렇게 펼치려 하지 않을까? 사실이 그렇다면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한 외화 전문 번역가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번역을 할 때, 영어 사전은 거의 찾아보지 않지만 우리말인 일어 사전은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번역 일을 하다 보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한정된 우리말밖에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후계자를 키울 때도 내가 가장 고심하는 것은 그의 외국어 실력이 아니라, 역시 그가 얼마나 일어 실력이 부족한가를 일깨워 주는 일입니다.”
우리라고 다를 게 없다. 정말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라도 그렇고, 아니, 그보다도 우리말을 우리가 많이 알아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 때문에라도 국어 공부에 한층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선문답(禪問答)에서

선문답(禪問答)에서
중국 당나라 중기, 지방의 태수로 부임한 백거이(772~848)가 산에 올라 조과 선사라는 고승과 문답을 나누었다. 조과 선사는 매우 가파른 벼랑 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사께서는 매우 위험한 곳에 계십니다.”
“태수 자리가 더 위험하지요.”
“제자의 지위가 강산을 진압하고 있는데 무엇이 위험하겠습니까?”
“장작불이 서로 교류하며 태우니 정말 위험하지 않겠소?”
백거이가 화제를 돌렸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오.”
“그거야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일 아닙니까?”
“세 살 아이가 알아도 팔십 노인이 행하지 못하는 것이오.”
이 짧은 선문답(禪問答:도를 깨우친 불가의 수도승이 주고 받는 문답.) 속에는 참으로 깊은 지혜가 들어 있다. 특히, 벼랑 꼭대기에 집을 짓고 사는 것보다 벼슬 자리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그 벼슬 자리는 마치 장작이 서로 불길을 보내며 서로를 열심히 태우다가 파멸해 버리는 것으로 설명한 부분이 절묘하다.
벼슬의 세계는 그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권모술수(權謀術數:남을 교묘하게 속이는 술책.)와 이전투구(泥田鬪狗:진창에서 개가 싸운다는 뜻으로, 명분도 없이 서로 사납게 싸운다는 뜻.)가 필연적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사실,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보다 벼슬 자리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지금 벼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을 각별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세상살이의 험난함은/ 산 때문도 아니요, 물 때문도 아니며/ 오직 사람의 마음이 이리저리 변하기 때문이라오.」
백거이(그의 자가 낙천이어서 백낙천으로 더 유명하며, 당송 8대가의 대문장가 중 한 사람이다.)의 <태행로(太行路)>라는 시의 끝 부분이다. 태행로란 중국에 험하기로 소문난 태행산 길을 말하며, 인생살이의 어려움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거기에 비유한 글이다.
이렇게 지식으로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그였지만, 그런 그도 ‘벼슬 자리가 벼랑 끝에서 사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도,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단순한 행위가 불법의 본뜻’인 것도 몰랐다는 사실에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는 과연 천양지차(天壤之差:하늘과 땅 만큼의 큰 차이.)가 있음을 알고도 남을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조과 선사와 백거이의 이 선문답으로부터, ‘아는 것을 행동으로까지 옮겨야 한다’는 의지력과 실천력을 배워야 할 것이다.

스물여섯번째

당신이 부자라면

당신이 부자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억척스레 돈을 모아 마침내 당대에 천 석 부자가 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어도 마음이 늘 편치 못했다. 그 동안 재산을 모으느라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자식들도 그의 의견에 잘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문제들을 풀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마침 먼 곳에 9대 천 석 부자이면서도 이웃과 사이가 좋다는 최 부자 댁 이야기를 듣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나는 그 동안 열심히 일해서 드디어 천 석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나를 따르지 않으며, 이웃 사람들도 저를 미워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9대를 천 석 부자로 내려오면서도 이웃과 사이가 좋다고 하니 그 비결을 듣고 싶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직접 말씀드리기는 쑥스러우니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지요.”
그가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물으니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최 부자 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매년 천 석 이상은 창고에 들이지 않습니다. 풍년이 들어도 그 남는 곡식으로 땅을 사 마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농사짓게 합니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최 부자 댁 땅이나 자기 땅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열심히 농사를 짓습니다. 그러다 흉년이 들면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거들어 천 석을 채워 줍니다. 이렇게 되어 이웃간의 정도 깊어지고 자녀들도 부모를 존경해 잘 따릅니다.”
그는 이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세상에는 묘한 속설 하나가 있다. ‘한 세대가 가난하면 다음 세대는 부자가 되고 다시 그 다음 세대는 가난해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유인즉, 가난의 서러움을 겪은 세대는 그것에 한이 맺혀 악착같이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지만, 그 다음 세대는 앞 세대의 풍족한 재산으로 어려움 없이 자라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다가 가난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 중에, 앞 세대는 재산을 열심히 모으느라 주변 사람들에게 각박한 행위를 서슴치 않게 되고, 어려움을 모르는 자식들은 부모의 그 몰인정한 태도에 경멸까지 보내게 되어 잘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자식들은 부모의 그 재산을 둘러싸고 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그것을 탕진하며 신세를 망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3대를 이어가는 부자가 없다’는 말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참으로 알쏭달쏭한 속설이지만, 일견 상당한 근거를 갖는 말이기도 하다.
만일 당신이 이런 천 석 부자 입장의 부모라면, 그래서 당신 자식들이 당신의 그 재산을 잘 지키며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이 이야기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남에게 베푸는 일이다. 그래야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어 9대를 이어가며 천 석 부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이웃 사람들과 아주 다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심과 유심

무심과 유심
옛날에 길이가 다섯 자나 되는 멋진 은빛 수염을 가진 노인이 살고 있었다. 노인의 그 긴 은빛 수염이 너무나 아름다워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마침내 왕까지 이 소문을 듣고 노인을 부르기에 이르렀다. 왕 역시 노인의 수염을 보고는 감탄했고,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이런 질문을 했다.
“노인께서는 주무실 때 그 아름다운 수염을 이불 밖에 내놓고 주무시나요, 아니면 이불 속에 집어넣고 주무시나요?”
그런데 이 질문에 노인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몹시 당황해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난생 처음 받아 본 것으로, 그 동안 자신이 수염을 어떻게 하고 잤는지 아무런 기억을 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노인은 그 동안 그저 편한 대로 무심히 행동해 왔기 때문에 그것을 별도로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불 속 아니면 이불 밖이었을 테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그렇게 갑자기 물으시니 그 동안 소인이 수염을 어떻게 하고 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밤 잠을 잔 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날 밤 노인은 잠자리에서 잠을 전혀 이루지 못했다. 수염을 이불 속에 집어 넣으니 그 긴 수염이 접혀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고, 이불 밖으로 꺼내 놓으니 턱이 당겨 또한 어색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밤새도록 그 긴 수염을 이불 속에 넣었다 꺼냈다 하면서 애만 태웠다.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이 이야기는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일면이 있다. 우리 역시 아무 생각 없이 평소에 행하던 일을 누가 갑자기 물으면 대답하지 못했고, 또 그것을 억지로 기억해 내려다 오히려 낭패를 당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수염과 함께 살아왔다. 그래서 특별히 기억이 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노인이 평소에 수염과 ‘공존’하며 ‘조화’를 이룬 ‘무심의 경지’에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왕의 질문을 받고서는 이 무심이 ‘유심’으로 바뀌어 노인과 수염이 ‘분리’되면서 ‘대립’되었던 것이다.
무심의 상태란 마음과 대상이 ‘일체’가 되어 ‘융화’된 상태로 자연스러움•평온함•안정감을 느끼는 상태이다. 이 상태는 욕심이 없어야 나타난다. 그러나 유심의 상태가 되면 마음과 대상이 ‘분리’되어 ‘경쟁’하면서 무리함•초조함•불안정함이 나타난다. 욕심이 마음을 흔들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노인의 이런 경우와 비슷한 예로, 운동 선수나 연주가가 관중과 청중을 의식하여 기교를 부리다가 오히려 망쳐 버리는 것과, 우리가 무언가를 억지로 기억해 내려다가 더 초조해지는 것들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무언가에 초조해하고 불안해지면 자신이 유심의 상태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유심의 근원인 욕심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낱말의 뜻’의 중요성

‘낱말의 뜻’의 중요성
유태 상인들은 세금을 속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금은 국가와의 계약’이고, 그 ‘계약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상인들이 하는 그런 탈세 행위는 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나라 밖을 떠돌며 박해를 받아온 그들은 세금을 냄으로써 그 나라의 국적을 부여 받고 있다고 깊이 인식하여, 스스로 세금에 대해서 아주 엄격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익이라는 낱말에도 세금의 개념이 확실하게 확립되어 있다. 즉, 그들이 이익이라고 말할 때는 이미 해당되는 세금을 공제한 순수한 이익만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일본 사람의 경우에는 이익에 세금도 포함되어 있다.
“이 거래에서 나는 10만 달러의 이익을 보고 싶다!”
만일 유태인이 이렇게 말한다면, 그리고 세금이 이익의 50%라면, 그는 이 거래에서 일본인이 말하는 20만 달러의 이익을 원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유태인을 잘 아는 어느 일본인의 말이다. 그가 말하는 이익의 개념을 수학식으로 정리해 보면, 유태인의 경우는 ‘이익=매출액-지출액-세금’이고, 일본인의 경우는 ‘이익=매출액-지출액’이 된다. 우리의 경우도 일본인의 경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 수학식은 국어학적인 의미에서는 이익이라는 낱말의 뜻을 정의(定義:어떤 개념의 내용이나 용어의 뜻을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있도록 명확히 한정하는 일.)하는 것과 같다.
필자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혼자 해 보았다.
‘일본인(또는 한국인)의 경우처럼, 이익이라는 낱말의 뜻에 세금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이익과 세금을 무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만큼 탈세의 여지도 높아짐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국민으로서의 기본 의무인 납세의 의무를 가볍게 생각한다는 것이며, 결국은 탈세자라는 범법자가 될 가능성도 높다.
세금을 나중에 별도로 계산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존해한다. 가상 이익과 실제 이익의 수치적인 혼란만 가져와 자금 운용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이고, 결국은 부도나 도산의 위기를 초래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이런 비합법적인 일들의 발생 원인은 이익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졌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아니, 그 이전의 ‘세금(=국가와의 계약.)’과 ‘계약(=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것.)’의 정의부터 잘못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탈세자와 파산자를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의 이 생각에 여러분들이 얼마나 수긍해 줄런지는 의문이지만, 정의를 분명히 내리는 일만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적당주의’라는 것도 이러한 낱말의 뜻 하나하나를 분명히 이해하며 정의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고, 그래서 ‘대형 사고’와 ‘불신’이라는 사회적 근심거리까지 불러왔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사직서를 품고

사직서를 품고
한 회사에 20년을 근무한 고급 간부가 있었다. 그는 너무도 열성적이어서,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항상 깊이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분석과 판단은 대체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중에 동료들과의 불화도 자주 있었다.
그러던 중, 외국의 유명 기업체로부터 이 회사에 합작 투자를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이 제안은 투자 규모가 상당히 커서 회사로서는 쉽게 수리하기 어려운 제안이었지만, 투자 조건과 기대 효과가 좋아서 그냥 파기해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제안이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장이 고심 끝에 전 임원과 간부들을 불러 그 안건을 깊이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사장의 의도가 투자를 했으면 하는 것이라고 느낀 임원과 간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의견에 맞추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그 결론도 합작을 하자는 쪽으로 나왔다. 너무도 좋은 기회여서 놓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종합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유독 그 간부 혼자만은 반대했다. 지금의 회사 실정에서는 도저히 불가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내심으로 투자하기를 바랐던 사장과 모든 동료들이 나서서 그를 설득해 보았지만, 그는 예의 근거 자료와 뚝심을 발휘하며 자기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만큼은 기를 꺾고 싶었던 동료 간부들이 그의 평소 독선적인 태도까지 들먹이며 인신 공격을 해 왔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사면초가에 몰리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사장은 이렇게 말하며 결정을 보류했다.
“이 사업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외부 전문기관에 감정토록 하시오.”
그런데 나중에 나온 그 결과는 그의 주장과 일치되는 내용이었다. 지금의 이 회사 입장에서는 절대로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그로써 회사는 결국 합작 투자를 포기했고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에게 인신 공격을 가해 왔던 동료 간부들이 그를 찾아와 사과하기에 이르렀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 혼자서 그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겁니까?”
이에 그가 말 없이 빙그레 웃으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놓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 새로 쓴 사직서였다.
사실, 그 간부는 이 회사에 근무하던 20년 동안을 매일 아침 이렇게 사직서를 써서 가슴에 품고 출근했던 것이다. 그는 매일매일의 출근날을 회사에서의 마지막 근무날이라고 생각하며 미련 없이 최선을 다해 일해 왔던 것이다. 이에 동료 간부들이 크게 감동했다.
직장에 다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사직서를 써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간부처럼 매일 사직서를 쓴다거나, 그 사직서에 특별한 개인 감정을 삽입시키지 않은 경우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근무날’이라는 배수의 진을 치고 일하는 직장인의 회사가 어찌 망할 것이며, 그렇게 사력을 다하는 직장인을 어찌 회사가 외면할 수 있겠는가.

북방에서 남방까지

북방에서 남방까지
북방 라마 대사에게 남방 대사가 전갈을 보내 왔다. 젊고 훌륭한 라마승 한 명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북방 라마 대사가 다섯 명의 젊고 유망한 스님을 선발해 남방으로 보냈다. 이에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으나 북방 라마 대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다섯 명 중에 단 한 명이라도 그 곳에 도착하면 다행이겠는데…….’
대사의 간곡한 당부를 듣고 다섯 스님이 힘차게 길을 걷기 시작했다. 며칠을 열심히 걸어 한 마을에 도착하니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 마을 절의 주지께서 어제 입적하셨는데 후임자가 없어 고민입니다. 부디 한 분만이라도 남아 후임자가 되어 주십시오.”
마을도 제법 컸고 주지의 보수도 두둑했다. 이에 한 스님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내 진정 불자로서 어찌 이들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할쏜가!”
그리하여 그 스님은 남고 나머지 네 스님이 갈 길을 재촉했다. 이번에는 어느 왕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왕이 보니 한 스님이 마음에 들었다. 왕이 그 스님에게 말했다.
“여기 남아 공주와 결혼한 후, 내가 죽거든 왕위를 계승해 주오.”
공주의 빼어난 자태와 왕의 호의에 이끌린 그 스님이 외쳤다.
“백성에게 불법을 가르치기로는 왕의 자리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세 스님이 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어느 외딴집이었다. 이 집에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혼자 살고 있었다. 며칠 전 산적들에게 양친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혼자 외로웠던 이 아가씨는 모처럼 찾아온 세 분 스님을 지성으로 모셨다. 이에 한 스님이 외쳤다.
“이 아가씨는 불쌍한 사람이다. 나는 이 불쌍한 중생을 구해야 한다!”
이제는 오직 두 스님 뿐이었다. 두 스님이 어떤 마을을 지나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믿던 불교를 버리고 힌두교로 개종하고 있었다. 이에 한 스님이 외쳤다.
“나는 여기 남아 불교를 되찾겠다! 그것이 불자로서의 주어진 사명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겨우 단 한 명의 스님만이 남방의 라마 대사를 찾아갔다.
우리는 북방 라마 대사가 왜 5배수나 되는 사람을 보내면서도 그렇게 근심해야 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만큼 인간의 의지가 약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원래의 목적과 사명을 쉽게 버리고, 그때 그때 자기 합리화로 무장하면서 수없이 많이 변절하는 우리가 아닌가.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자문을 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가는 길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나는 정녕 지금 계획대로의 길을 가고 있는가?”

오직 지도 하나만으로

한 탐험가가 오랜 고생 끝에 드디어 아마존강 유역 일대를 탐사하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러자 동네의 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 곳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탐험가는 그것을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럴 방법을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라! 그 세계 최대의 거대하고 웅대한 숲, 그 숲 속에 들어 앉은 수천 수만 종의 진기한 동·식물들, 100미터도 더 되는 거대한 고목이 즐비한가 하면, 깨알같이 작은 이끼류에, 난생 처음 보는 아름답고 진귀하고 희귀한 꽃과 열매와 수초들…….
그런가 하면 숲 사이를 굽이굽이 감도는 강줄기와 그 곳에만 존재하는 이름도 모를 희귀한 파충류·양서류·포유류·갑각류 등등, 거기에 드높은 협곡에서 쏟아져 내리는 천 길 폭포와 격류도 있었고, 다시 개인적으로 체험한 야수들의 위협과, 위기의 순간과, 죽음에의 공포들까지……. 이 모든 기막힌 장면들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탐험가는 이 모든 광경들을 자신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떠올리고는 도무지 말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나로서는 그것을 도무지 말로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설명할 적당한 낱말을 찾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지도 한 장을 드리겠으니 언젠가 시간이 나면 그 곳을 직접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옛부터 내려오는 말에도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보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결국 그 지도 한 장을 받아 들고 돌아갔다. 그런데 그 다음 날부터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즉, 그 지도를 받아 간 사람들이 저마다 그것을 한 장의 종이 위에 그리더니 아마존강 탐험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이 강 이름은 무엇이고 너비와 수심은 얼마이며, 또 어떤 강과 만나 급류와 폭포를 이루고 있으며, 거기에 무슨 동물과 식물이 있다는 둥, 전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자기들끼리 다투며 떠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탐험가가 그들에게 지도 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지난 뒤였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알지도 못하는 사실을 잘 떠벌이는 일면이 있다. 그들은 오직 지도 하나만으로, 없는 강을 만들어 내고 있는 산도 없애면서 탐험을 하는 재주가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게 하는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심지어는 실제로 탐험을 한 사람까지 거짓말장이로 만들어 배척하기까지 한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풍문들이 너무도 많다. 그것은 풍문을 만든 사람의 가벼운 혀와 그것을 들어 주는 사람의 얇은 귀가 만들어 내는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중하고 냉정하고 의연한 태도를 유지해서 그런 헛된 풍문들을 잠재워야 할 것이다.

데일 카네기의 결단

35년 전, 나는 뉴욕에서 가장 불행한 청년 중 한 명이었다.
그 때 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트럭을 팔고 있으면서도 트럭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몰랐고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경멸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나는 뉴욕 서부 56번가 허름한 셋방에 머무르며 내 생활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방은 형편 없이 낡아 벽에 걸었던 넥타이에서는 바퀴벌레가 쏟아져 나왔고, 식사는 불결하기 이를 데 없는 싸구려 식당에서 해야만 하는 그런 생활이 너무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매일 밤 고민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실망·번뇌 그리고 고통이 마음에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매일 밤을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었다. 학창 시절에 품었던 그 아름다운 무지개 꿈과 너무도 다른 현실이 역겹기만 했던 것이다.
‘이것이 내 인생이란 말인가!’, ‘내가 그렇게도 기대에 부풀어 마음 설레었던 그 꿈이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해야 하고, 바퀴벌레와 같이 살면서 그 진절머리 나는 식사를 해야 하며, 아무런 미래의 희망도 없이 이렇게 질질 끌려가는 이 생활이 정녕 내 인생이었단 말인가!’나는 이렇게 비참한 생활 속에서 한탄하다가, 옛날 학창 시절의 즐거웠던 독서 시간과 창작 시간을 기억해 냈고, 마침내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이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버려서 학창 시절의 그 꿈 같은 시대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그것이 내 진짜 인생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내가 대부분의 청년들이 인생의 출발점에서 맞게 되는 그런 ‘결단의 순간’이 도래한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싫어하는 직업을 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나섰다.
일찍부터 나는 돈벌이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인생을 내 나름대로 체험해 보고 싶다는 의욕만은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심이 그 후의 내 미래를 완전히 바꿔 놓았던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그 후 35년 동안 줄곧 행복했으며, 내 꿈도 기대 이상으로 이루어졌다.
성공학의 저술가로 유명한 데일 카네기가 말하는 자신의 직접 경험담이다. 그는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성공학 분야에서는 그 이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또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성공의 핵심이 되는‘결단’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자신의 삶이 즐겁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이 말을 깊이 새기며 새로운 결단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찾는가!

당신은 당신이 원한다면 어디서든지 범죄·폭력·음모·마약·매음·노름 현장을 찾아 낼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인정·정직·진실·봉사·희생의 현장도 찾아 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서울의 거리에서도 범죄 현장을 찾아 낼 수가 있고, 부산의 지하도에서도 폭력 현장을 찾아 낼 수가 있고, 대구의 육교에서도 음모 현장을 찾아 낼 수가 있고,……, 그러나, 인천의 뒷골목에서도 사랑의 현장을 찾아 낼 수가 있고, 광주의 시장에서도 인정의 현장을 찾아 낼 수가 있고, 대전의 호텔에서도 정직의 현장을 찾아 낼 수가 있다.
문제는 당신이 어디서 무엇을 찾느냐이다!
또한, 당신은 당신이 원한다면 어디서든지 타락한 사람·부패한 사람·불행한 사람·사악한 사람들을 찾아 낼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정직한 사람·깨끗한 사람·행복한 사람·진실한 사람들도 찾아 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수원의 거리에서도 타락한 사람을 찾아 낼 수가 있고, 춘천의 지하도에서도 부패한 사람을 찾아 낼 수가 있고, 청주의 육교에서도 불행한 사람을 찾아 낼 수가 있고,……, 그러나, 전주의 뒷골목에서도 정직한 사람을 찾아 낼 수가 있고, 마산의 시장에서도 깨끗한 사람을 찾아 낼 수가 있고, 제주의 호텔에서도 행복한 사람을 찾아 낼 수가 있다.
문제는 당신이 어디서 누구를 찾느냐이다!
당신은 이렇게 당신이 원하는 사람을 어디서든지 찾아 낼 수가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찾아 낸 이 사람들로부터 다시 결점과 장점까지도 찾아 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가장 덕스럽다는 사람에게서도 무능하다는 결점을, 가장 정직하다는 사람에게서도 융통성 부족이라는 결점을,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서도 날카롭다는 결점을,……, 그러나, 가장 교활하다는 사람에게서도 지혜롭다는 장점을, 가장 나약하다는 사람에게서도 무난하다는 장점을, 가장 잔인하다는 사람에게서도 용맹스럽다는 장점을 찾아 낼 수가 있다.
문제는 당신이 이들의 어느 점을 찾느냐이다!
어쨌든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가장 훌륭하다는 사람들에게서도 결점을, 그리고 가장 악덕하다는 사람에게서도 장점을 찾아 낼 수가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한다면 아직도 당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장·단점을 동시에 찾아 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는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의 장·단점을, 일터에서는 상사와 동료와 부하의 장·단점을, 나라에서는 지도자와 국민의 장·단점을 찾아 낼 수가 있다.
문제는 당신이 이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 모든 이들에게서보다 우선 당신 자신과, 당신의 과거·당신의 현재·당신의 미래에서 그것을 먼저 찾아 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찾고자 하는 것들은 이미 그 속에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공포심을 없앤 사연

“소녀 시절에 저는 모든 사람이 제게 예쁘다고 말해 주기를 원했어요. 나는 아무의 눈에도 들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나를 아름답다고 칭찬해 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죠.
‘너 같이 보기 흉한 오리새끼에게 멋진 상대가 나타날 리 없지!’
언니와 동생들도 이렇게 저를 놀려 댔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창피한 생각만 가득했어요. 그러다 보니 옷은 아줌마가 입던 낡은 것만 입었고 춤이나 스케이트도 탈 줄 몰랐어요. 다른 애들처럼 예쁘지도 못해 댄스 파티에서는 언제나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어야 했지요.
저는 지금도 그 순간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답니다. 성탄절 파티에 제가 여느 때처럼 혼자 외롭게 앉아 있을 때, 한 젊은이가 내게 다가와, ‘저와 춤추지 않겠습니까?’라던 그 말과 그리고 그 기쁨을요! 그의 이름은 F.D. 루스벨트(1882~1945)였지요.
아무튼 저는 20년 이상을 그런 열등감과 공포감으로 살았어요. 저희 집안은 어머니나 할머니나 숙모들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뉴욕 사교계에서 알아 주는 쟁쟁한 미인들이었는데, 어째서 저만 그렇게 못생겼는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이런 제가 용기를 얻게 된 것은 저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 주는 일을 시작하고부터였어요.
그러니까 1910년 남편이 뉴욕 주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있었을 때, 남편은 너무나 많은 회의를 하느라 매일 밤 동료들과 함께 우리 부부의 좁은 방까지 사용하곤 했지요. 그 때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다른 의원의 부인들을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그 부인들이 호텔방에서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남편 이외에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이 딱한 부인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부인들을 격려하던 중 어느 사이엔가 저에게도 용기와 자신이 솟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 세상에서 공포심만큼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도 없지요. 그러나 저는 저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돕기 시작함으로써 그 공포감을 극복할 수 있었어요. 두려워서 손을 대지 못하는 어떤 일이 있다 해도 무난히 그것을 처리해 낸다면 누구나 공포심을 극복할 수 있다고 저는 믿어요. 단, 그러기 위해서는 늘 그 일을 계속해서 작은 실적이라도 쌓아 올리는 것이 좋아요.”
미국의 유일한 4선 대통령 F.D. 루스벨트의 부인 A.E. 루스벨트 여사(1884~1962)의 말이다. 그녀는 남편의 내조에도 크게 기여했지만, 여성 문제·인권 문제 그리고 명 칼럼니스트로 미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성이었다. 그녀의 못생긴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일에 몰두함으로써 공포심을 없앴다’는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이며, 더불어 영원한 명언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1=1+1’

“하나 더하기 하나는 얼마냐?”
“둘입니다.”
젊은 제자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노스승이 반박했다.
“어째서 둘이냐? 물방울 하나에 물방울 하나를 보태면 큰 물방울 하나가 되고, 호랑이 한 마리와 토끼 한 마리를 합해도 그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어 결국은 한 마리밖에 남지 않느냐?”
노스승의 이 허를 찌르는 궤변에 제자가 당황해하는데 노스승이 다시 물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얼마냐?”
“예, 하나입니다.”
“아니다. 사과 하나에 또 다른 사과 하나를 보태면 두 개의 사과가 아니냐?”
“아니, 아까는 하나라 하셨다가 지금은 둘이라 하시면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옳겠습니까?”
젊은 제자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자 노스승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지식, 즉 ‘보통의 지식’과 ‘특수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였다. 보통의 지식이라 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식이고, 특수한 지식은 그 상식을 벗어난 또 하나의 지식을 말한다.
사람들은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라고 당연한 듯 대답하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의 약속된 지식일 뿐 진리는 아닌 것이다. 때로는 하나가 될 수도 있으며, 영도 되고, 셋도, 넷도 될 수 있다.
똑같은 힘을 가진 두 사람이 줄다리기를 하면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게 되는데 이것은 ‘1+1=0’을 뜻하며, 부부가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얻으면 ‘1+1=3, 4,……’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는 이처럼 두 가지 지식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사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배우는 지식들은 모두 상식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식에는 ‘1+1=2’를 진리라고 믿게 하는 함정이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상식의 노예를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위에서의 예처럼,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둥근 전구의 부피를 구할 때, 지금은 누구라도 전구 표면의 곡선 길이를 일일이 재면서 계산하는 어려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 전구 속에 물을 넣고 그 물의 부피를 계산하면 아주 간단히 구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식도 옛날에는 특수한 지식에 속한 것이었다.
‘1=1+1’이라는 이 집합론적 수식도 옛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특수한 지식이었지만, 지금은 컴퓨터의 기본 이론으로 적용되는 상식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현재 상식(보통의 지식)에 묻혀 있으면 발전이 없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특수한 지식에도 부단히 관심을 기울여야 계속 발전한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특수한 지식에도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스물일곱번째

‘왜’ 그리고 ‘어떻게’

‘나는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 왜 그럴까?’(7세)/ ‘저 큰 배가 어떻게 물 위에 떠서 다닐 수 있지?’/ ‘얼마 동안 이 알을 품고 있어야 닭이 나올까?’/ “아저씨는 또 왜 그걸 모르세요?”/ 이제 세계사와 영국사 그리고 로마제국 흥망사까지 다 읽었구나!’(12세)/ ‘로마가 망한 이유는 사치스런 생활•방탕한 생활•교만한 생활 때문이었구나!’/ ‘사람의 머리는 쓸수록 좋아지지만 쓰지 않으면 녹슬고 만다.’/ ‘렌즈를 통과한 햇빛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래, 씨를 뿌려야 꽃이 핀다. 또한 꽃이 피어야 열매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사실을 정확하게 관찰해야 하는데, 나는 그 동안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전신을 통해 부호가 보내집니까?(17세)”/ ‘전기의 신기한 힘은 무엇일까?’/ ‘부모님을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나도 이제 21살이다. 50세까지 산다면 29년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는 일요일과 축제일에도 일하자!’/ ‘어떤 발명품도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태어나지는 않는다.’/ ‘이것이 결점이다. 그걸 없애 보자!’/ “아니, 기계가 말을 할 수 있다니!”(사람들의 감탄, 30세)/ ‘내 꿈은 백열 전등을 만드는 것이다, 인류를 위해서!’(그러나 당시의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반박했다. “에너지 불멸의 법칙은 모순이다. 그의 새로운 기획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며, 옛날 이야기와 같이 허황된 것이다. 그대여, 꿈에서 깨어나라!”)/ ‘백열 전등, 기어이 만들고 말 테다!’(그는 당시에 사용되던 가스등에 관한 논문을 공책 200권에 깨알 같이 작은 글자로 무려 4만 페이지나 작성하며 공부했음.)/ ‘답답하다! 전등의 눈이 어디며 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으니……, 이러다가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야! 불이 들어왔다! 세계 최초의 백열 전등이다! 이제 나는 45시간에서 100시간 이상 빛을 발하는 전등을 만들 것이다!(32세)”/
‘90세가 되려면 아직도 20년이 남았다. 그 기간이라면 새로운 발명을 해낼 충분한 시간이 있다.’(그 때도 하루 4시간만 자며 연구에 몰두했음.)/ “요즘의 학교 교육은 틀에 박힌 인간만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인간의 전반적인 지식과 힘을 발달시키지 않는 것 같아요. 청소년들은 사물을 스스로 보고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해요. 그래야만 장차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있어요.(83세)”/ “①만약에 당신이 100만 달러의 유산을 받는다면 어떻게 쓰겠소? ②당신은 행복•쾌락•평판•명예•돈•애정 중에서 어느 것과 목숨을 바꾸겠소? ③당신이 세상을 떠날 때쯤 인생의 실패와 성공을 어떻게 구별하겠소? ④당신은 어떤 경우에 거짓말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십니까?”(그가 장학생을 뽑을 때 물어본 상식에 관한 질문 예제들임.)좦
T.A. 에디슨(1847~1931), 그는 이렇게 84년 동안을 ‘왜’와 ‘어떻게’라는 끊임없는 질문과 의문으로 불세출의 발명왕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이 의문사들이 그의 성공 시작점이자 도착점이었으니, 우리도 그의 ‘왜’와 ‘어떻게’로 시작되는 질문 태도를 열심히 배워야 할 것이다.

생각을 먼저 많이 하고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 진나라에 도둑이 들끓자 왕이 극옹이라는 사람을 시켜 도둑을 잡도록 했다. 그에게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번만 척 쳐다보아도 도둑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무서운 관찰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도둑은 크게 줄었고, 만족한 왕은 조문자라는 신하를 불러 이렇게 자랑했다.
“오직 한 사람을 채용해서도 그 들끓던 도둑이 사라지고 있으니, 이제는 많은 사람이 필요 없게 되었소.”
그러자 조문자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런 대답을 했다.
“관찰력으로는 도둑이 퇴치되지 않을 겁니다. 아마 극옹이 자기 명대로 살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 그대로 적중되었다. 궁지에 몰린 도둑들이 모두 모여 상의를 하더니, 자신들에게 이런 고초를 안겨 준 사람이 극옹이라며 그를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조문자를 즉시 불렀다.
“과연 경의 말대로 되었소.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도둑을 퇴치시킨단 말이오?”
“옛 말에 ‘연못 속에 숨어 있는 물고기까지 환히 들여다 보는 것은 좋은 일이 못 되고, 사람의 비밀을 너무 자세히 밝혀 내는 것에도 화가 미친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정말로 도둑을 없애려 하신다면 이제라도 어진 사람을 등용해서 정치를 맡기시고, 그 가르침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루 미치도록 하십시오. 백성들이 염치를 알게 되면 도둑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이 말에 왕이 수회라는 어진 사람에게 정치를 맡겼더니 정말로 도둑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열자의 <<설부편>>에 들어 있는 이 이야기는 바람직한 문제 해결의 한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즉, 특이하고 기발한 묘수에 의하기보다는 원칙에 근거한 정수를, 임기응변에 의한 단기 대책보다는 장기적인 근본 해결책을 찾는 것이 좋으며, 강한 방법보다는 부드러운 방법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를 들으니 <<북풍과 태양>>의 동화 이야기가 떠오르고, “묘수가 세 번 나오는 대국은 반드시 진다.”는 바둑 격언도 떠오른다.
그렇다. 두터운 오바를 벗기는 데는 모진 북풍보다 따뜻한 태양이 더 효과적이고, 위기 후에 깜찍한 묘수를 찾는 것보다는 사전에 정수를 두어 위기를 없게 하는 게 더 훌륭한 방법이다.
그 동안 우리는 죽은 후에 약방 찾는 격으로, 일이 실패하면 그 실패한 이유를 놓고 시끄럽게 떠들어대곤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런 시끄러운 질책과 비판이 아니라, 차근차근 정도를 밟아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날카로운 극옹이 아니라 어진 수회라는 뜻이다.
말만 앞세우면서 생각 없이 행동에 옮기면 문제가 끊일 날이 없지만, 생각을 먼저 많이 하고 행동에 옮기면 보다 완벽한 해결책을 찾아 낼 수 있다.

‘먼저 가시죠!’

덴마크와 스웨덴이 전쟁을 벌여 덴마크가 크게 승리한 적이 있었다. 패배한 스웨덴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승리한 덴마크 병사들은 그 스웨덴 병사들을 뒤에서 열심히 쫓고 있었다. 이 때, 한 덴마크 병사가 심한 갈증을 느끼고 물통의 물을 마시려 했다. 그런데 곁에서 이런 갸날픈 음성이 들려 왔다.
“내게도 물 한 모금만 주시오. 갈증이 나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오.”
덴마크 병사가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니, 심하게 부상 당한 스웨덴 병사 한 명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이 가엾은 병사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며 자신이 마시려던 물통을 전해 주기 위해 다가갔다.
이 때였다. 힘 없이 쓰러져 있던 그 스웨덴 병사가 갑자기 날쌘 동작으로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 덴마크 병사를 향해 그대로 발사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총알이 빗나가 덴마크 병사는 무사했고, 그는 즉시 반격을 가해 스웨덴 병사를 제압했다. 그는 자신의 호의를 무시한 이 적군의 비열한 기습에 크게 분노했다. 기습을 했던 스웨덴 병사는 ‘이제는 죽었구나!’라는 생각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모습을 본 덴마크 병사가 또다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이렇게 말했다.
“너의 딱한 모습을 보니 차마 죽일 수가 없다. 어서 이 물을 마시고 여기를 떠나거라!”
전쟁이 끝난 후, 스웨덴 왕이 그 얘기를 들었다. 왕은 덴마크 정부에 간곡히 요청해서 그 덴마크 병사를 불렀다. 그리고는 왜 그런 비겁한 병사를 살려 주었는지 물었다. 병사가 대답했다.
“부상 당해 아픈 사람을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스웨덴 왕이 이 말에 감동하여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우리는 자라면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 왔다. 그러면서 때로는 흥분하고 감동하면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약자를 괴롭히면 안 된다!”, “등을 보인 사람에게 총을 쏘아서는 안 된다!”, “부상 당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등등의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말이다.
옛부터 진짜 사나이들의 상식밖에 되지 않았던 이 말들이, 세월이 한참 지나서인지, 각박한 세상으로 바뀌어서인지, 이제는 그 실천 현장은커녕 말조차도 듣기 어렵게 되었다. 오히려 ‘왕따’니 뭐니 하면서 어린아이들까지 약한 친구를 집단으로 따돌리며 괴롭히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거리에서도 무법의 ‘총알 택시’가 나타나 힘없는 보행자들을 겁주며 마구 달리고 있다.
필자가 서양에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면서 배운 바에 의하면, ‘자동차는 신호등과 상관 없이 사람이나 자전거에게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야 어떻든 기계가 인간에 우선할 수 없고, 강한 것이 약한 것에 양보해야 한다는 상식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상식이 굳게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보행자 앞에서 무조건 정지하는 자동차들이 줄을 이었으면 좋겠다. 거기에 운전자까지 공손하게 손을 내저으며 ‘먼저 가시죠!’라는 멋진 동작까지 보여 주면 정말 좋겠다. 그런 말 탄, 아니 자동차 탄 진짜 기사님은 어디 계신가?

“거절합니다!”

“당신은 거절을 잘 합니까?”
이 질문은 어느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처음 대면할 때면 반드시 묻는 질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환자들은 “거절을 잘 못 합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사실, 이 환자들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대장부는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온 이 나라의 대장부들 역시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자기 자신의 확고한 의지에서 나오는 대답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지만, 정신 질환자들의 경우는 의지가 없는 상태 즉 우유부단한 상태에서 나오는 우물쭈물의 대답이기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우유부단하여 다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아라는 확실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가 없으니 자신의 뚜렷한 주관과 판단을 내세울 수 없고, 그래서 문제 속으로 뛰어들어가 해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문제 자체를 회피하려고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자신의 눈 앞에 전개된 엄연한 사실을 눈만 감고 외면해 보려는, 그래서 당장의 평안이나 얻어 보려는 노예 근성이나 다름없는 행위인 것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은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막연한 적개심이나 불안감까지 갖게 되어 사회에서 소외되고 만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은 서로간의 경쟁을 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무리하게 공격해 오는 상대방과 때로는 싸워야 하고 때로는 거절도 해야 한다. 일방적인 양보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줏대 없이 남의 기준에만 맞추며 문제를 피하기만 하면, 당장은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는 몰라도 머지않아서는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적개심과 불안 속에서 오히려 더 큰 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문가의 관점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이 사회에는 잘못된 상식이 적지 않다고 본다. 예를 들어, 싸움을 잘 하면 호전적이라고 하고, 거절을 잘 하면 매정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위의 경우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당한 이유에서의 대응이나 뚜렷한 소신에 의한 거절 행위는 전혀 비난 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자아가 강하고 책임감이 투철할수록 그런 행동을 더욱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며 거절하지 못하다가, 끝내는 감당하지 못하여 뒤에서 비난하거나 무기력하게 좌절해 버리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정신과 의사의 이 말을 들으면서, 우리도 이제는 “거절합니다!”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해도 좋을 것이다. 운동 선수들이 시합 전에 ‘파이팅!’을 외치며 투지를 불태우듯이, 우리도 ‘거절합니다!’라는 확신에 찬 의사 표시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자기 자신의 정신적 안정’은 물론, 지금 이 사회의 큰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수뢰 사건이나 독직 사건 같은 사회악도 제거되는 ‘사회적 안정’의 효과까지 가져올 것이다.

안경 찾기

한 노인이 안경을 끼고 책을 읽는 도중에 손님이 찾아왔다. 노인은 책 읽기를 멈추고 손님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님이 돌아가자 노인은 책 읽기를 계속하려고 책갈피를 뒤져 안경을 찾았다. 평소에 노인이 안경을 책갈피에 끼워 놓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경이 책갈피에 끼어 있지 않았다. 그러자 노인이 혼자 이렇게 생각을 더듬어 나갔다.
‘나는 책을 읽을 때만 안경을 쓴다. 그러다가 책 읽기를 중단하게 되면 책갈피에 안경을 끼워 놓는다. 평소에 그렇게 했으니 오늘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경은 책갈피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책갈피에 안경이 없다. 즉, 안경을 잃어 버렸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내가 안경을 분실했거나 누가 그 안경을 가져갔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안경을 가져갔다는 얘기인데, 누가 안경을 가져갔을까?
당연히 안경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런데 안경이 정말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미 자기의 안경을 갖고 있을 것이므로 내 안경을 굳이 가져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안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것을 가져갈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내 안경을 가져가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가져가지 안경이라면 안경은 여기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미 그것을 확인했듯이 이 곳에는 안경이 없다. 그것은 내가 눈으로 확인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안경을 끼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나는 안경이 없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것은 곧 내가 지금 안경을 끼고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그 안경은 당연히 내 코 위에 걸려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노인은 혼자 싱긋이 웃으며, 자기의 손을 코 끝으로 옮겨 직접 안경을 만져 보았다.
이 싱거운 이야기는 하나의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싱거운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가 배우려는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배울 것은 많다.
“업은 아이 3년 찾는다.”라는 속담 그대로 가까이 있어도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그러나 그럴 때도 몸보다 머리로 찾는 것이 더 낫다는 것과, 머리로 찾되 이렇게 논리적으로 차례차례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는 것과, 그리하여 이런 사실들을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다른 문제에도 응용할 수도 있다는 것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싱거운 이야기에서도 배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배울 것이 많다는 사실까지도 배울 수 있는, 바로 이런 것들을 이 이야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행복과 건강은?

유태인의 한 마을에서 가난한 남자가 랍비를 찾아와 이런 하소연을 늘어 놓았다.
“랍비님! 저의 집은 비좁은 데다가 아이들은 많고 거기다 악처 마누라까지 있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제게 좋은 해결책을 알려 주십시오!”
남자의 불평을 들은 랍비가 그에게 물었다.
“집에 염소를 기르고 있소?”
“예, 두 마리를 기르고 있습죠. 유태인치고 염소를 기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그렇다면 오늘부터 그 염소들을 방 안에 들여 놓고 함께 지내시오.”
랍비의 이 말에 그 남자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찾아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랍비님! 이젠 정말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못된 여편네에 두 마리 염소까지 한 방에 있으니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랍비가 이렇게 다시 물었다.
“집에 닭도 기르고 있소?”
“예, 열 마리가 있습니다. 도대체 닭도 기르지 않는 유태인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닭도 방 안으로 모두 들여다 놓으시오.”
남자는 다시 돌아갔으나, 다음 날 동도 트기 전에 일찍 찾아와 이렇게 하소연했다.
“랍비님! 이젠 정말 미치고 말 지경입니다. 악처 마누라는 둘째 치고라도, 두 마리 염소와 열 마리 닭이 방 안에서 온통 난장판이고 거기다 배설물까지 가득해서 정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도 못 견디겠단 말이오?”
“아이고, 랍비님!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렇다면 이제 염소와 닭을 다시 밖으로 내 보내고 내일 다시 나를 찾아오시오.”
이튿날 그 남자가 랍비를 찾아왔을 때, 그는 마치 천국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표정으로 기쁘게 말하는 것이었다.
“랍비님! 염소와 닭이 밖으로 나가니 이제 저의 집은 천국이 되었습니다. 랍비님께 신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서도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다가, 진짜 불행을 만나서야 비로소 뒤늦게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리석음을 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행복이란 건강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존재할 때에만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잃은 뒤에는 아무 소용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지금 자신이 확보한 만큼의 행복과 건강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얘기다.

마음의 그림자

사람은 누구나 그림자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그림자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거나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림자란 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긴 것으로 나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도 그림자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있다. 육체의 발밑을 따라다니는 그 그림자가 아니라 정신의 발밑을 따라다니는 그 그림자에 대해서 말이다. 육체가 빛을 가로막아 생기는 그림자는 현실적으로 아무 영향도 주지 않지만, 정신의 빛을 가로막아 생기는 그 그림자는 심리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인 의미에서의 그림자란 우리 의식이 빛을 향하고 있을 때 그 뒤에 드리워지는 어둠, 즉 ‘내가 강조하고 주장하는 측면의 이면에서 내가 무시하고 도외시하는 심적인 것’으로 풀이된다.
예를 들어, 개성적인 사람의 무의식에는 집단적인 그림자가, 집단적인 사람의 무의식에는 개성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개성적인 사람이란 자기의 개성과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우선적으로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집단적인 사람이란 집단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자기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들 둘 다는 상대방의 성향을 자기 무의식 속에 갖고 있지만, 상대방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미워하기도 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은 이 그림자의 투사로 인해서 생긴다고 말한다. 자기가 항상 갖고 있으면서도 외면해 오던 그림자가 상대방에게 있을 때 공연히 질투하며 화를 낸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에 못 견디게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이상하게 그 사람에 대한 미운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며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때가 바로 그림자에 사로잡혔을 때이다. 자기는 분명 그를 미워하는 이유를 줄줄이 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은 스스로를 답답하게 가두는 어둠뿐이다. 이런 때는 한 번쯤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혹시 내가 미워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의 그림자는 아닌지. 그래서 나와 재미있게 놀고 멋진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그림자를 괜히 질투하여 어둠 속으로 쫓아 버려 스스로 외로워지는 것은 아닌지. 나 또한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성향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그래도 한순간이나마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휴가철이다. 이 때를 맞아 그 동안의 분주했던 일상 생활에서 벗어나 머리를 좀 식혀 보자. 더불어, 이 정신의학자가 한 말들을 음미하며, 자기 마음 속의 어두운 그림자도 한번 관찰해 보자. 그럴 때 우리는, 어쩌면 놀라운 도약을 맛볼지도 모른다.

마음 수양

인도의 한 고행자가 인간으로서의 육체적 고통을 겪어 보고자, 한여름 길가에 장작을 쌓아 놓고 그 위에 올라가 불을 붙였다. 뜨거운 태양 하나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때에 장작불까지 치솟으니 오죽하겠는가. 고행자는 온몸에서 억수 같은 땀을 쏟으며, 팔과 다리와 이마와 가슴에까지 닿는 불길에의 고통을 용케 참아 내고 있었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여승이 고행자의 이 처절한 모습을 보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당신은 불에 태워야 할 것은 태우지 않고, 어째서 태우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열심히 태우고 있나요?”
고행자가 분개하여 소리쳤다.
“못난 여중이 가소롭게 끼어드는구나. 그래 네가 말하는 그 태워야 할 것이란 무엇이더냐?”
여승이 대답했다.
“태워야 할 것은 당신의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노여움입니다. 그 노여움을 태워 버려야 당신은 진정한 수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소가 짐수레를 끌 때 수레가 굴러가지 않으면 문제가 되는 소에게 매질을 해야지, 애매한 수레에 매질을 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육체는 바로 수레와 같은 것이고 마음은 소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죄 없는 육체를 괴롭힐 것이 아니라, 그 노여움을 간직한 마음에 채찍을 가하고 태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화살을 쏘면 호랑이는 화살을 쏜 사람에게 달려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개들은 자기를 때린 돌을 쫓아갑니다. 호랑이는 문제의 원천을 쫓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하지만, 어리석은 개는 아무 소용 없는 것이나 쫓으며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이란 것도 알고 보면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당신도 육체의 고행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행을 시작하도록 하세요.”
여승의 이 말에 고행자가 깊이 깨닫고 불길을 빠져 나와 무릎을 꿇었다.
≪대장엄논경≫>에 들어 있는 이 글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육체의 수양보다 정신의 수양에 힘쓰라는 것을 말해 주는 내용이다.
그렇다. 우리가 느끼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도 알고 보면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이다. 마음이 없는 죽은 자들에게는 고통도 없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우리가 겪는 가난의 고통도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더 심각하다는 사실에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괴롭고 어려울 때마다 그 원인을 마음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노여움·분노·증오 등을 찾아 내어 태워 버리는, 그런 마음 수양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걸음걸이 속도

어떤 나그네가 급한 일이 있어 낯선 땅을 걷게 되었다. 그는 초행길인지라 길을 가면서 사람들에게 행선지를 자주 묻곤 했다. 이번에는 밭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물었다.
“여기서 다음 마을까지 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
나그네의 이 물음에 농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그네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나그네는 농부의 이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몹시 상했지만 굳이 따지기도 뭣해서 자신의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농부가 그 때부터 나그네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다. 얼마 동안을 이렇게 따라오던 농부가 드디어 나그네를 불러 말했다.
“여보시오, 나그네 양반! 당신은 지금부터 45분 후에 다음 마을에 도착할 거요.”
농부의 이 말에 나그네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런 거라면 아까 내가 물을 때 대답해 줄 것이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따라와서 대답한단 말이오?”
그러자 농부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까는 내가 당신의 걸음걸이 속도를 몰라 대답해 주지 못했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당신을 한참 뒤따라와서 당신의 걸음걸이 속도를 안 후에야 대답해 주는 것이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마냥 천천히 걸으면 얼마든지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빨리 걸으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게 아니겠소? ”
농부의 이 대답에 나그네가 허를 찔린듯 깜짝 놀라 농부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이야기 같지만, 그래도 농부의 이 마지막 말에는 아주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당신의 걸음걸이 속도를 알아야 소요 시간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 말에는 다른 사람이 걸린 시간은 그 사람의 소요 시간을 판정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또한 어떤 일에 임해서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평균치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뜻도 담겨 있다.
우리는 평균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지나치게 높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개념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것이지, 부분을 설명하는데는 허점이 많다.
예를 들어, 같은 50년 인생이라 해도 누구는 다른 사람의 30년 인생보다도 못할 수가 있고, 누구는 70년 인생보다도 나을 수가 있다. 그 사람의 인격·능력·업적 같은 사항은 그 사람이 얼마 동안(시간=나이) 걸었느냐보다는 얼마나 빨리(속도=노력) 걸었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 걸음걸이 속도를 좀더 빠르게 내디뎌서, 가능한한 더 많은 결실을 맺도록 해야 할 것이다.

책 한 권 때문에

젊은 수도승이 숲 속에서 혼자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수도승이 찾아와 그에게 경전 한 권을 주고 갔다. 수도승은 고마운 마음에 그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수도승은 쥐들이 그 경전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수도승은 쥐들로부터 그 경전을 지키고자 고양이 한 마리를 마을에서 구해 왔다. 그러자 고양이에게 줄 우유 구하는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등장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젖소 한 마리를 구해 왔는데, 이제는 젖소에게 줄 풀이 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목초지를 개간하기로 했다.
그가 이렇게 해서 목초지를 개간하여 젖소와 고양이까지 기르다 보니 이제는 경전 읽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기 대신 일해 줄 일꾼들을 고용해야 했다. 그러자니 또 그 일꾼들을 감시할 사람이 필요해졌고, 그래서 그는 마침내 결혼까지 해서 아내와 함께 일꾼들을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생활이 2년여가 지났을 때, 이제 그는 커다란 집과 아내와 두 아이와 고양이와 젖소 열 마리를 소유한 유능한 사업가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일 쉬지 않고 그것들을 돌봐야 했으며, 또한 그것들을 잃지 않으려고 많은 신경을 쓰며 조바심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제 그는 경전 읽는 일은 아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옛날에 경전을 주었던 그 수도승이 찾아왔다. 그 수도승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러자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글쎄, 나로서는 법우님이 주신 그 책 한 권을 열심히 지키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범하는 과오나 과실도 대부분 이와 같은 것들이 많다. 하나의 순수했던 목적이 동기가 되어 멋지게 출발했지만 어느덧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고, 다시 그 부작용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고……, 그러다가 결국은 원래의 목적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나 붙잡고 씨름하는 그런 과오들 말이다. 그래서 결국은 더 잘해 보려던 것이 더 잘못되어지고, 더 행복하려 했던 것이 더 불행해지고 마는 것이다.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려다가 부도를 내고 파산하는 사람, 더 많은 쾌락을 추구하려다가 범죄자가 되는 사람, 더 많이 일하려다가 오히려 건강까지 잃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바치겠다던 사람이 본래의 맹세에서 벗어나 온갖 명분을 갖다 붙이며 추한 명예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 또한 그런 모습들이다.
어떤 과정에서나 어려움이 있고 함정도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해결해 나가는 도중에 작은 변화라도 필요하게 되면, 그때 그때의 당위성으로 쉽게 변화해 버릴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하는 확인 작업을 꼭 거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어느덧, 점잖은 수도승에서 분주한 사업가로 변해 있을 것이다.

스물여덟번째

<나의 기도>

『내게 이런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약할 때 자기를 알고 힘을 기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과/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소서./
사리를 판단할 때 고집으로 인하여 판단을 흐리지 않게 하고/ 생각하고 이해하여 사심이 없는 판단을 하게 하며/ 또한 평탄하고 안이한 길만이 삶의 전부라 생각지 말게 하시고/ 고난에 직면할 때 분투 노력할 줄 알며/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소서./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이 설정하되/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알며/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 날을 잊지 않게 하여 주소서./
이에 더하여/ 삶을 엄숙하게 살아감은 물론/ 유머를 알고 삶을 즐길 줄도 알게 하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도 알게 하여 주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먼 훗날/ 내 인생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하여 주소서.』
<나의 기도>라는 제목의 이 시에는 참인간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가득 담겨져 있다. 참으로 바람직한 소망으로써 이 중 몇 가지만 소유하더라도 성인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는 한 해가 마감되고 시작되는 연말 연시가 되면, 너나없이 새로운 계획을 세워 그것이 그 해 안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새해 벽두를 맞아 새로운 의지로 힘차게 세월을 이끌고 나간다.
그러나 1년이라는 세월도 그렇게 짧은 것만도 아니어서인지, 계절의 순환 속에 어울리다 보면 어느덧 그 소망도 다 잊은 채 세월에 힘없이 이끌리어 하루하루를 무력하게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가 불현듯 그 소망을 생각해 내곤 하지만, ‘이미 금년도 틀렸다!’는 생각에 남은 기간마저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금년도 이제 절반을 지나 ‘3분의 2’ 지점을 통과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새로운 계획을 세웠던 추운 겨울의 정반대 지점인 한여름의 3복 더위 속에 와 있다. 그러나 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겨울의 그 굳은 맹세를 생각하고, 그 때 그 소망을 기억해 내는 일이야말로 정말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그 동안의 차질과 시행착오도 충분히 메울 수 있는 1년의 3분의 1이라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으니, ‘여름철에 스케이트를 배우고 겨울철에 수영을 배운다’는 말처럼, 정말 차원 높은 비약을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더불어, 시작과 끝만 강조되는 이 사회에서 중간 과정도 그에 못지 않게 강조되었으면 하고 새삼스레 기도해 본다.

리스트의 훌륭함

F. 리스트(1789~1846)는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빼어난 피아노 연주 솜씨가 특히 유명했던 음악계의 큰 별이다. 그러나 이런 음악적 재능 못지 않게 훌륭한 인격자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가 어느 날 작은 마을을 여행하느라 호텔에 묵고 있을 때, 불현듯 한 소녀가 찾아와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는 선생님께 큰 죄를 지었어요.”
갑작스런 소녀의 방문에 그것도 자신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소녀에게 리스트가 영문을 몰라 난처해하는데, 소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었다.
“자, 그러지 말고 차분히 모든 것을 말해 봐요. 도대체 무슨 죄를 내게 지었다는 거요?”
리스트의 차분한 말에 소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 저는 그 동안 시골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주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는 저인지라 저의 연주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는 병든 아버지의 약값과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릴 수 없었던 저는, 나쁜 일인 줄 잘 알면서도 제가 선생님의 제자라고 거짓 선전을 하며 연주를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방금 선생님께서 이 곳에 와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이렇게 찾아와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저같이 솜씨도 없는 사람이 선생님의 제자라고 거짓 선전해서 선생님을 욕되게 해 왔던 것입니다.”
소녀가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울먹이자, 상황을 이해한 리스트가 소녀에게 말했다.
“아무 걱정 말아요, 소녀. 그리고 소녀가 원한다면 오늘 이 시간부터 진짜 내 제자로 받아 주겠소. 가족을 위해 그렇게 헌신하는 제자를 둔다면 오히려 내가 더 자랑스러운 일이오. 그건 그렇고 내일 프로그램이 아직 인쇄되지 않았다면, 거기에 스승인 리스트와 함께 연주하다고 적어 주지 않겠소? 그럼 내일의 연주를 위해 지금 함께 연습을 해 봅시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소녀는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존경하는 진짜 선생님을 한없이 우러러보았다. 다음 날의 연주회가 그 어느 때보다 성황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은 리스트의 훌륭한 음악적 재능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어려운 사람을 생각해 주는 고매한 인격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경을 헤쳐 나가느라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그런 딱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고매한 인격자들에게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힘있고 강하고 똑똑하다고 스스로 자찬하는 그런 잘난 사람에게가 아니라, 이런 딱한 사람들과 훌륭한 인격자들에게 시선과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슐리만의 집념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한 독일의 고고학자 H. 슐리만(1822~1890)의 일생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큰 의미를 가르쳐 준다. 어린 시절에 읽은 호메로스(?~?)의 이야기에서 트로이의 유적 발굴이라는 꿈을 키운 뒤, 한평생 집념을 갖고 오직 그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목사의 아들로서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그는 14세라는 나이에 사환 일을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고문서를 해독할 수 있는 어학 실력, 발굴 작업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 그리고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연구할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환 일을 하면서 어학 공부를 시작했는데, 마침내는 15개 국어에까지 능통했다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기는 해도 그의 강렬한 집념이 그의 재능까지도 향상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그 뛰어난 어학 실력 덕분에 큰 무역회사에 간부로 발탁될 수 있었고, 드디어는 자기 사업으로 많은 돈까지 벌 수 있었다.
참고로, 그가 말하는 자신의 15개 국어 습득 과정을 여기 소개해 본다
“나는 먼저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영어에 빨리 익숙해지는 한 가지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선 소리내어 대단히 많이 읽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결코 우리 말로 번역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매일 1시간씩 보충 공부도 하며, 관심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작문을 하였다가 나중에 그것을 교사에게 수정 받고, 그리고 다음 날까지 그 수정된 내용을 전부 암기해 버리는 방식이었다. ”
이러면서도 그는 영국 교회를 찾아가 영어 설교도 듣고 심부름할 때도 책을 들고 다니며 암기했다는 것이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교사도 자신의 사환 급료의 절반을 주고 채용한 개인교사였다고 하니, 그가 이 일에 얼마나 열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불과 6개월 만에 영어를 습득했고, 같은 방법으로 프랑스어, 네델란드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등도 습득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상당한 재산을 모은 42살이 되자,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무역업을 정리하고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준비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1870년에 발굴 작업에 나서서 마침내 역사적인 대발견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혹자는, 슐리만의 일생을 오직 트로이의 유적 발굴 하나만을 위한 단순한 것으로 과소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일생을 통해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의 강렬한 꿈과 집념이 그를 성공시켰다는 사실이다. 강렬한 꿈과 집념, 그것은 저마다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이며, 그것만 있으면 누구라도 당연히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신중한 태도로

유대인의 대표 한 사람이 가톨릭 신부 앞에 나아가 종교 문답을 치루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대사교가 유대인 대표 한 사람을 불렀는데, 유대인 대표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나서지를 못했다. 그러자 나이 어린 소년이 자원했다.
소년이 대사교를 찾아가니 대사교가 대뜸 엄지손가락 하나를 보였다. 이에 소년이 손가락 세 개로 응수했다. 이번에는 대사교가 손을 펼쳐 휘저었고, 소년이 이에 주먹을 쥐어 보였다. 다시 대사교가 금잔에서 콩을 한 움큼 쥐고 바닥에 뿌렸을 때, 소년은 그 흩어진 콩을 모두 금잔에 주워 담아 자기의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그러자 대사교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소년을 돌려 보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소년조차 저렇게 영특한 것을 보니 하나님이 선택한 유대 민족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소. 내가 소년에게 엄지손가락을 보이며 너희 유대인들은 한 분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더니, 소년이 손가락 세 개를 보이며 당신들은 성자·성부·성신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오. 그래서 내가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손을 저었더니, 소년이 주먹을 내 보이며 그래도 우리는 하나로 똘똘 뭉쳐 있다고 대답하지 않았겠소?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하나님은 너희들을 버려 온 땅에 흩뜨렸다고 콩을 바닥에 뿌렸더니,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하나씩 다 챙기며 지켜 주신다며 그것들을 일일이 주워 담아 주머니에 넣지 않았겠소? 이 얼마나 훌륭한 대답이란 말이오.”
그러나, 소년이 집에 돌아와 설명한 내용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내가 대사교를 찾아갔더니, 그가 내게 손가락 하나를 보이며 한 번만 묻겠다고 하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내가 손가락 세 개를 보여 주며 세 번을 물어도 좋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는 내가 말을 듣지 않는다며 손바닥으로 따귀를 때리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러면 나는 주먹으로 대응하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이번에는 화가 났던지 금잔에 있던 콩을 바닥에 확 뿌리길래, 당신이 필요 없다면 내가 가져가겠다며 그것들을 금잔에 주워 담아 주머니 속에 넣었죠.”

세상을 떠도는 평판에는 이처럼 엉뚱한 해석에서 나온 허황된 것들이 적지 않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몇몇 사람들이 대단한 것으로 각색하고 미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본래의 가치가 드러나면, 몹시 실망하여 아주 간단히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그 때마다 그들의 동조자가 되어, 함께 떠들고, 함께 비난하고, 함께 배척하곤 한다.
이런 경솔한 태도는 이제 저 하늘 멀리 날려 보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보다 신중한 태도로 평가를 내리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야 할 것이다.

좋은 지도자

옛날 어느 나라에 생각이 깊은 지도자가 있었다. 하루는 이름난 도공이 정성들여 만든 아름다운 도자기를 그에게 선사했다. 그 도자기는 그가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는 그런 멋진 도자기를 선사한 도공에게 진심으로 감사했고, 그에 대한 충분한 보답도 했다.
그런데 도공이 떠나가자마자, 그는 그 아름다운 도자기를 즉석에서 바닥에 던져 깨뜨려 버렸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이유를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도자기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소. 그러나 나는 과격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날 이 아름다운 도자기를 청소하는 하인들이 깨뜨리기라도 한다면 화를 참지 못하여 그 하인을 죽일 것이오. 그런 불행한 일을 일부러 기다릴 필요가 무엇이 있겠소?
또 다른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훌륭한 지도자였다.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는 그렇고 그런 지도자와는 달리, 그는 처음부터 한결같이 선정을 베풀었고 그래서 많은 존경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남다른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은 매일 아침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형편 없는 인간이다! 잠시만 방심하면 금방 변질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다! ”
나중에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까닭을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힘있는 자에게 아부하기를 좋아하고 나 또한 아부에 약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이렇게 나 자신을 매일 질타하며 하루하루를 지켜 나가고 있는 거요.”
사람들은 이 말에 감동했고, 선정을 베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선정을 베푸는 일만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한 조직의 지도자가 되어 그 조직을 올바르게 이끄는 일 또한 어렵다. 그들 지도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고, 그로 인해 그들이 치루는 마음 고생 또한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지도자를 인격 수련자에 비유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렇다. 지도자는 인격 수련자다. 하루도 빠짐 없이 혹독한 시련을 이겨 내야 하고, 영원한 난적인 자기 자신을 꺾어야 하고, 각종 아부나 유혹에도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 그런 고매한 인격 수련자다. 그래서 그들의 일터는 인격 연마의 도장이기도 한 것이다. 처음에는 멋진 출발을 보였다가 중도에 변질되어 탈락되는 지도자들이 그렇게도 많은 이유도, 알고 보면 이런 인격 수련에 소홀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라면 늘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미리 예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인격 수양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내일도 역시 좋은 지도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자식에게 일을!

부자 아버지에게 일하기 싫어하는 아들이 있었다. 일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말을 듣지 않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어느 날 이런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나는 너같이 일하기 싫어하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 줄 용의가 없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네가 밖에 나가 일하여 직접 금화 한 닢을 벌어 온다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아들은 누구보다도 강직한 아버지의 이 말에 겁을 먹었고, 그래서 밖에 나가 돈을 벌어 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웃집으로 달려가 금화 한 닢을 빌린 뒤, 일부러 한나절이 지나서야 집에 돌아와 아버지 앞에 그 금화를 내놓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즉석에서 금화를 집어 던졌다.
“이게 어째서 네가 직접 일하여 번 돈이라는 거냐!”
아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들은 좀더 그럴싸한 방법으로 아버지가 모르는 친구에게 금화 한 닢을 빌린 뒤 밤늦게 돌아와 그것을 아버지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번에도 금화를 집어 던졌다.
“이것도 네가 직접 번 돈이 아니지 않느냐!”
아들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귀신 같이 알아맞히는 아버지를 더 이상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 아들이 이번에는 정말 밖에서 직접 돈을 벌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마땅한 일자리가 있을 리 없었고, 그래서 그는 공사장에서 일 주일이나 심한 중노동을 한 뒤에야 겨우 금화 한 닢을 벌 수 있었다. 아들이 그 금화를 내놓으니 아버지가 이번에도 금화를 집어 던졌다.
“이것도 네가 번 돈이 아닌 걸!”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아버지가 던진 그 금화 한 닢을 향해 날쌔게 뛰어가 줍고는 손에 꼭 잡은 뒤, 이렇게 완강히 저항하는 것이었다.
“왜 내 돈을 집어 던져요! 왜 내가 뼈아프게 고생해서 번 돈을 집어 던져요!”
아들의 이 모습에 아버지가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음, 이번에는 진짜로군! 그래, 나 역시 그 동안 너처럼 그렇게 뼈아프게 벌어 왔다!”
남으로부터(부모라 해도 마찬가지다,) 받은 돈과 내가 직접 번 돈의 차이는 이렇게 본질적으로 달라진다. 말부터 우선 ‘내 돈!’으로 바뀌고, 같은 돈이지만 남다른 애착과 고귀함과 자신감까지도 갖는다. 일하면서 겪었던 고생이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남으로부터 받은 돈에는 그런 것들이 자리잡지 못한다.
자식에게도 일을 시켜야 한다. ‘그 어린 것이 어떻게……?’라는 동정심에서 벗어나, 일에 대한 고귀함과 가치관을 심어 주어야 한다. 부모가 일부러 시키는 고생이 고생이 아니라, 마음에도 없는 일을 죽지 못해 하는 것이 진짜 고생이라는 사실을,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확실히 가르쳐 주어야 한다.

금혼식날 안 것

어느 노부부의 금혼식날이었다. 그 동안 서로 건강했고, 수입도 상당했고, 사회 활동도 활발했고, 부부 관계도 무난했고, 슬하에 자식도 많은 행복한 노부부의 금혼식날이었다. 그래서 이 날 모든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이들 노부부의 금혼식을 축하해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장은 행운의 열쇠를 보내 왔고, 단골 레스토랑에서는 축하연까지 마련해 주어 더욱 빛나는 하루였다. 이들 부부는 오늘 하루를 이렇게 특별히 더 행복하게 보내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은 뒤, 50년을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부인은 부엌으로 들어가 따뜻한 커피와 우유를 준비해 남편에게 주었고, 남편은 식탁 위의 빵을 잘라 아내에게 주었다. 이것은 이들 부부가 지난 50년 동안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해 온 한결같은 습관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오늘따라 빵을 받은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가. 남편이 이렇게 좋은 날 우는 아내의 손을 감싸 쥐며 위로해 주었다.
“여보! 오늘 같이 좋은 날 웬 눈물이오? 아마도 우리의 50년 결혼 생활이 새삼스럽게 생각나서 그러는가 본데 그렇다고 울 것까지야 뭐가 있겠소?”
그런데 아내가 고개를 흔들며 뜻밖의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닌가.
“여보, 오늘은 내가 솔직히 한 마디 할게요. 어째서 당신은 그 맛없는 빵의 끝부분을 꼭 나에게만 주는 거죠?”
실제로 남편은 그 동안 자신이 자른 빵의 끝부분을 꼭 아내에게 주었었다. 물론 이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내의 이 말에 남편이 심한 충격을 받으며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신이 그 동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소. 왜냐하면 나는 그 동안 내가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가장 맛있는 빵의 끝부분을 당신에게 주어 왔기 때문이오.”
아내 역시 이 말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50년을 함께 살아왔던 이들 부부였지만, 이 날에야 마음 속의 비밀을 이야기함으로써 그 동안의 진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위해 힘껏 노력했으면서도 50년 동안 서로 맛없는 빵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들이 이런 대화를 좀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50년 동안 서로 맛있는 빵을 정말 맛있게 먹었을 텐데 말이다.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대화이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해서 대화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를 위해 참느라고 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을 너무 아끼면 이 노부부처럼, 50년 후에나 겨우 진실을 알면서 부질없는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마음 속의 불만을 숨기지만 말고 상대방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실패한 날을 기억한다

유대인은 자신들의 패배한 날이나 굴욕적인 날을 기념하는 보기 드문 민족이다. 그들은 패배를 기억하는 데서 자신의 힘을 얻는다고 믿는, 그래서 종종 ‘패배의 천재’라고까지 불리우는 민족이다. 다른 민족들이 승리한 날만을 좋아하고 실패한 날을 무시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확실히 독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매년 가장 대대적으로 치룬다는 과월절(또는 유월절, Passover) 축제 행사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과월절 축제이면서도, 이들은 이 축제 기간인 1주일 동안 일부러 누룩 없는 맛없는 빵과, 씁쓰레한 나물과, 삶은 달걀을 먹는다. 그 옛날 조상들이 노예 시절에 받았던 학대와 수모를 잊지 않겠다는 뜻인데, 이 중 삶은 달걀을 먹는 이유는 그것은 삶으면 삶을수록 단단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조상들이 당했던 고통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매년 이런 행사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
나라 없이 망국민으로 떠돌던 1,900여 년 동안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심한 박해와 구박을 받으면서도 끝내 자신들의 혼을 잃지 않고 결국은 나라까지 되찾았던 이유도, 알고 보면 이런 실패의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밖에서의 고난과 패배가 크면 클수록 안으로는 더욱 단단해졌던 그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패를 잊지 않겠다는 태도는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오히려 성공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실패를 통해서만이 오직 평소에 깨닫지 못하던 약점을 찾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때로는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 이후에 갖는 우리의 태도와 마음가짐이다. 성공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더욱 큰 성공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계속적인 성공은 결국 자만감을 불러 실패에의 위험이 증가하게 된다. 반면에 비록 몇 번의 실패는 있었지만, 그로 인해 받은 수모와 고통을 잊지 않고 자신의 약점을 고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방심은 곧 위기요,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명언처럼 실감나는 표현도 없다 하겠다.
실패의 경험을 잊으면 발전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받을 때는 지난 날의 편안했던 시절을 기억해 내다가도 편안해지면 과거의 고통을 잊는다. 그러다가 결국 파멸까지 당하는 예도 적지 않은데 말이다.
우리 역시 6·25전쟁과 8·29국치라는 참담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우리의 100% 노력 끝에 얻은 완전한 해방도 못 되는 8·15 광복절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이런 쓰라림과 패배를 안겨 준 아픈 날들도 기억하며 반추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와 같은 아픔을 다시 겪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

작은 마을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 청년은 아주 평범한 청년이었다. 집안이 가난해서 대학 진학도 포기한 아주 흔한 청년 중에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 청년이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그것은 그가 단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뉴욕의 체인점에 취직해 일하는 것이었다.)를 얻기 위해 보여 준 행동은 아주 남다른 것이었다.
우선 마을 우체국으로 달려가 뉴욕시의 전화번호부를 뒤졌고, 그렇게 해서 찾아 낸 수백여 개의 체인점에 일일이 구직 편지를 보낸 것이 그랬다. 아무런 연줄도 없고 특이한 경력도 없어서 그랬다지만, 어쨌든 그의 그러한 행동은 확실히 남다른 바가 있는 행동이었다. 그는 그 편지에 자신이 그 곳에 취직되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다고 적었다. 예를 들면, 청소 일이나 배달 일 같은 것이라고 했다. 타자기도 없었던 그는 그 내용마저도 일일이 손으로 써서 보내야 했다.
이런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곳에서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회사 사정에 따라 사람을 채용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일언반구의 응답도 없는 이런 경우에도 편지를 계속 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편지를 계속 보냈다. 그래도 단 한 번의 답장이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쯤에서 완전히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시 달랐다. 이번에는 낯도 길도 설은 뉴욕을 직접 찾아 나선 것이다. 만류하는 부모님을 오히려 설득시키고, 불과 2,3일 정도의 묵을 숙박비만을 챙겨 직접 뉴욕으로 나선 것이다. 뉴욕에 도착해서 그가 자신이 편지를 보냈던 그 많은 체인점 중에 하나를 찾아갔을 때, 지점장은 오히려 그를 반기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우리 체인점에 393통의 편지를 보냈소. 나는 당신이 언젠가 이 곳을 직접 찾아올 줄 알았소. 당신에게 사무일을 맡기고 싶은데 오늘 오후부터 그 일을 시작할 수 있겠소?”
그래서 그는 그토록 갈망하던 뉴욕에서의 일자리를 얻었고, 실력을 인정 받아 마침내 지점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성공학자 노만 필 목사가 전하는 월터 하터라는 미국 청년의 실화 내용이다. 언뜻보면 우직한 청년의 바보 같은 이야기로 들리지만, 사실 그 바보 같은 행동 속에 성공의 모든 비결이 들어 있으니 놀랍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 한 회사에 무려 393통의 편지를 쓰고 보내는 일이 어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적어도 몇십 곳에 이만큼 보냈을 것까지 생각한다면 더욱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끈기·인내·정성·신념·투지·집념·근성 등이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성공의 핵심 요소들이 아니던가.
자기 회사에 393통의 편지를 써서 보낸 그 열렬한 지원자를 회사는 마다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여 얻은 자리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사람도 없다. 그래서 당연히 성공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안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책을 읽어야 한다

1991년 한국갤럽조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가운데 한 달 동안 주간지·월간지 이외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사람이 무려 61%나 된다고 한다. 책을 읽지 않는 비율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높아져, 20대는 38%, 30대는 57%, 40대는 70%, 50대는 87%가 매달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살아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에 비해, 프랑스의 경우는 1년에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비율이 25%였으며, 일본의 경우는 한 달에 평균 1.4권의 서적을 읽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의 경우는, 연간 책 구입비(1987년 기준)는 가구당 보약 구입비 38,460원(월 3,205원)에는 물론, 화장품 구입비 13,524원(월 1,127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10,524(월 877원)원에 불과해, 독서보다 정력 보강이나 몸치장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1인당 지출액으로 환산하면 1,300원 정도로, 독일의 10만 원, 미국의 7만 원, 일본의 4만6천 원 등에 비해 매우 미약한 수준이다. (1990년 유러모니터 조사)
이 자료는 다소 옛것이라 하더라도, 1997년 4월3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내용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발견된다. 우리나라 성인의 1년 평균 독서량은 9.1권으로 일본의 19.2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월평균 도서 구입비(잡지·참고서 제외)도 94년 1만 원→95년 9천 원→96년 8천 원으로 오히려 감소 추세에 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보약을 많이 먹어 몸이 건강해지고, 화장을 열심히 해서 예뻐지는 것도 좋지만, 책을 읽지 않으면 그보다 더 소중한 정신이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길에서 화투치고 술 마시는 모습은 많이 보여도 책 읽는 모습은 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우리는 일본인이나 서양인들이 지금도 전철이나 버스에서는 물론, 버스를 기다리며 줄을 서고 있을 때에도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책을 읽지 않는 자의 미래는 없다.”/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육체와 같다.”/ “인생을 알려면 사람과 접촉할 것이 아니라, 책과 접촉하라.”/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책을 읽으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독서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은 인생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피난처를 마련하는 길이다.”/ “좋은 책을 읽을 때, 나는 3천 년이나 더 산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이 읽은 책으로 알 수 있다.”/ “집은 책으로 가득 채우고, 정원은 꽃으로 가득 채우라.”/ “나는 한 시간의 독서로 누그러지지 않는 그 어떤 슬픔도 알지 못한다.”/ “위대한 영웅·천재 발명가·훌륭한 학자, 그들 모두는 어렸을 때 좋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다.”」
새삼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제 더 이상 선현들의 이 말씀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물아홉번째

행동과 느낌

서양 사람들이 행동(doing)을 내세운다면, 동양 사람들은 느낌(feeling)을 강조하는 듯하다. 이는 서양 사람들의 드라마(또는 영화)와 우리의 드라마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의 연속극이나 영화는 사건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건과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사건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겹쳐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정신 차리고 보지 않으면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네 영화나 연속극은 그렇지가 않다. 사건보다는 사람들의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극중의 인물이 어떻게 고뇌하고, 어떻게 기뻐하고, 어떻게 슬퍼하고, 어떻게 분노하는가를 시청자들과 관객에게 상세히 보여 주려고 애쓴다.
이혼 결심을 한 어떤 여자가 그 이혼을 앞두고 어떤 고뇌를 하고 있을까를 그 여자의 회상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애쓴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회상을 통해 다시 방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혼을 앞두고 고민하는 모습을 그렇게 오랫동안 보여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고뇌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고뇌한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 보는 사람들의 몫으로 맡기고,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이내 다른 사건으로 발전한다. 이혼 서류에 도장 찍고 보면 어느덧 새 남자를 만나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이렇듯 우리는 참으로 서로 다른 사고 체계와 인식 체계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우리의 이러한 느낌 중심의 통합적·총체적인 사고 체계와 문화 체계가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사람과 사물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폭넓고 깊이 있는 전망을 세울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서양 사람들의 사고 체계보다 이점이 더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도 많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요즈음 느끼는 것은, 세상이 하도 복잡하고 특히 여러 가지 현상들이 다양하게 상호 연계되어 영향을 주고 받는 복잡한 모습을 띠게 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사고도 이제는 좀더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필요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연세대 이성호 교수의 「지금 당신의 자녀가 흔들리고 있다」의 일부 내용이다. 느낌과 행동, 총체적인 사고와 구체적인 사고로 동·서양을 대비시킨 수긍이 가는 글이다.
이 두 가지 사고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서로간의 장·단점이 있어서 상호 보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보다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행동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만 하며 행동을 게을리 하는 동안, 그들이 행동을 앞세워 우리를 앞질렀던 과거의 그 경험을 이제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철저한 하루하루의 자기 관리

그 일요일에, 그가 그렇게 미루어 왔던 서류 정리를 시작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집안 곳곳에 가득한 서류들이 이제는 상자로도 10여 개가 넘어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날 그는 어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 그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드디어 첫 번째 상자를 열고 맨 위에 놓여져 있는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이미 1년 전에 받았던 그러나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세금 미납 독촉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차,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이걸 어쩌지. 그 때 즉시 처리했었어야 했는데…….’
그는 이렇게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며 후회했다.
그리고는 이런 골치 아픈 일보다는 좀더 쉬운 신문 스크랩 정리부터 하기로 마음먹고 옆에 있는 신문 뭉치를 잡아당겼다. 그것은 그가 꼭 읽어보겠다며 그 동안 힘들여 모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첫 번째 기사를 읽으면서 이렇게 투덜거렸다.
‘이 유익한 기사를 왜 진작에 읽지 않았는가! 그랬다면 며칠 전 그 곤욕스런 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이렇게 또 후회했다. 그리고 이 유익한 기사들을 하루 빨리 모두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그 많은 기사를 그 자리에서 읽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편지 상자를 열었다. 맨 앞에서는 옛날에 그렇게 다정했던 친구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좋은 친구였지. 그러나 지금은 연락이 끊어졌으니…….’
그는 이번에도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진 그 옛 친구를 그리워하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또 다른 상자를 열며…….
그 날, 그는 결국 아무런 정리 작업을 하지 못한 채 더 많은 후회와 아쉬움만을 느껴야만 했다.
할 일을 너무 미루면 뒤늦게 그 일에 착수한다 해도 이렇게 아쉬움과 후회만 남기게 된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그때 그때 즉시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성공을 원하면서도 어떻게 하는 것이 성공인지는 잘 모르고 있다. 무언가 거창하고 위대한 일을 해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직 그런 일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생각해 보라. 성공이란 일생의 성공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일생의 성공은 매년의 성공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매년의 성공은 매달과 매일로 나누어져 있으니, 당연히 매일의 성공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할 것이 아닌가. 그것은 곧 ‘철저한 하루하루의 자기 관리’가 곧 성공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게으름 없는 하루하루의 철저한 자기 관리가 곧 성공인 것이다.

살아서 일하고 죽어서 쉰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스승과 함께 길을 걷다가 말했다.
“쉴 곳이 있었으면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삶에는 쉴 곳이 없느니라.”
“쉴 곳이 없다니요?”
“저기 보이는 저 무덤이 바로 우리가 쉴 곳이니라.”
자공이 그제야 알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공자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람들은 삶의 즐거움은 알되 괴로움은 모르고, 늙는 것이 고달픈 것으로만 알고 편안한 것임은 모르며, 죽는 것이 나쁜 것으로만 알고 쉬는 것임은 모르느니라. 그래서 안자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좋은 일이로다, 죽음이여! 현명한 자는 거기서 쉬고, 현명하지 못한 자는 그것에 굴복 당하도다!’
죽음이란 덕이 귀착하는 곳이다. 옛날부터 죽은 사람을 돌아간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은 길을 가고 있다는 뜻이다. 길을 가면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길을 잃은 사람이다. 한 사람이 길을 잃으면 세상 사람들이 그를 비웃으면서도, 세상 사람 모두가 길을 잃으면 누구도 비웃을 줄을 모르니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늙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대부분 두려워하고 있다. 평균 70년을 살다 가는 한시적인 우리들이기에, 어찌 보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될 일과 안 될 일을 구분할 줄 알고, 그래서 될 일에는 두 배의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되 안 될 일에는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는 그런 고도의 지혜 말이다. 과연, 누가 세월 따라 저절로 찾아오는 늙음과 죽음을 막고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어느 통계 자료를 보면, 지금까지 이 세상을 살다간 사람들의 숫자는 약 6백억 명 정도라고 한다. 이 무수한 사람들 모두가 그 죽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 중에는 천하가 모두 자기 것이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른 사람들도 많았고, 죽은 사람까지 살린다는 천하의 명의도 그렇게 많았는데 말이다.
생명이란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노쇠해지는 것이고 그러다가 결국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자체가 더욱 소중한 것이고 또 의미도 있는 것이다. 설혹, 의학과 과학이 발달하여 그 죽지 않는 문제를 해결했다 하더라도, 이 지구 환경은 그 무수한 생명을 모두 책임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늙음과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피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살아 있음에 감사하자! 그래서 더욱더 열심히 일하자! 그러다가 때가 되어 생명이 다하게 되면, 극락이든 천당이든 하늘나라든 땅 속이든 그 어디에서라도 마음 놓고 휴식을 취하자.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오래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칼럼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칼럼을 애독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8.9.9 황필상

걸어온길

1991년에는 대학교수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는 도전을 위하여 생활정보지인 (주)수원교차로를 창업하여, 1995년까지 대표이사로서 회사를 성장시켜 왔다. 1995년부터는 칼럼니스트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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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필상박사가 우리의 이웃과 후손을 위해 남기신 컬럼을 실었습니다. 고인의 평소 바램대로 우리는 모두가 훌륭한 인격체로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튼실한 기둥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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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강좌

2007년 1년동안 수원 시민들을 대상으로한 창의력개발과 자기계발을 위한 특별강좌가 있었습니다. 이 특별강좌를 통해 황필상박사의 평소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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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금신청

학업에 대한 강렬한 열정과 잠재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발전가능성이 보이는 학생들 중에서 우리 재단의 Vision에 공감하며 차세대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학생을 본 재단에서 지정한 대학교를 통해 장학금 수혜자로 매 학기 선발합니다. 장학사업은 재단 설립자인 황필상 박사의 “대한민국의 미래 棟梁之材 양성” 이라는 큰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본 재단의 핵심 사업입니다.